봉모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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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제도
1776년(정조 즉위년)에 정조가 설치한 규장각(奎章閣)의 주요 시설 중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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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776년(정조 즉위년)에 정조가 설치한 규장각(奎章閣)의 주요 시설 중의 하나.
내용

규장각은 왕립도서관 및 왕립연구원의 성격을 지닌 기관으로서 내각(內閣)과 외각(外閣)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 내각에는 본부인 이문원(摛文院)을 비롯하여 서고(書庫)시설로서 주합루(宙合樓)·봉모당(奉謨堂)·열고관(閱古觀) 및 개유와(皆有窩)·서고(西庫:西序라고도 함)·이안각(移安閣:書香閣이라고도 함) 등이 있었는데, 봉모당은 모훈(謨訓:국가의 대계)의 자료를 봉장(奉藏)하던 으뜸가는 존각(尊閣)이다. 그 명칭도 이러한 기능면에서 붙여진 것이다.

모훈이란 ≪상서 尙書≫의 ‘대우모(大禹謨)’·‘고요모(皐陶謨)’와 같이 임금과 신하가 서로 논의한 것을 적은 글과 임금이 백성에게 훈유한 것을 적은 글의 합성어이다. 이 모훈 자료에는 어제(御製)·어필(御筆)·어화(御畫:御眞이라고도 함)·고명(顧命)·유고(遺誥)·밀교(密敎)·선보(璿譜)·세보(世譜)·보인(寶印)·보감(寶鑑)·장지(狀誌) 등이 포괄된다.

이와 같이 모훈의 자료를 소중하게 봉장하는 것은 규장각의 으뜸 기능이며, 그 기능이 개창 초기부터 엄격하게 수행되어 왔다. 매년 봄·가을에 두 번 임금은 왕세자와 더불어 예복을 갖추고 정해진 의식절차에 따라 엄숙하게 전배의(殿拜儀)를 실시하였으며, 매달 두 번씩 각신(閣臣) 2인으로 하여금 봉심(奉審:왕명을 받들어 능이나 종묘를 보살핌)하게 하되, 사전에 봉심하는 날짜를 보고하고, 봉심한 뒤에는 이상 유무를 보고하도록 규정, 실시하였다.

모훈의 자료를 봉장할 때에도 임금이 직접 행하거나 각신이 대행하였는데, 역시 예복을 갖추고 일정한 의식절차에 따라 엄숙하게 봉서의(奉書儀)가 이루어졌다. 모훈자료의 보존관리에 있어서도 신중을 기하였다. 매년 1회씩 포쇄(曝曬:젖거나 축축한 것을 바람에 쐬고 볕에 말림)하고 먼지털이 작업을 하였는데, 이 경우도 일정한 의식절차를 밟아 실시하였으며 포쇄할 때 또는 마친 다음 선온(宣醞:임금이 신하에게 술을 하사하던 일이나 하사하던 술)이 베풀어질 때도 선온의(宣醞儀)에 따라 행하였다.

이와 같이 모훈자료의 봉장이 조선 말기까지 엄숙하게 수행되어 왔기 때문에 그 자료가 오늘에 전해진 것이다. 문화사적인 면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봉모당은 규장각의 본각인 주합루의 서남쪽 언덕 위에 있던 옛 열무정(閱武亭)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그 건물은 중앙이 겨우 한 칸이고 곁에 협실(夾室)과 감탑(龕榻)을 마련한 협소한 건물이어서 1857년(철종 8) 1월에 규장각의 본부인 이문원 북쪽에 있던 대유재(大酉齋)로 옮겼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이 집정하자 봉모당을 종친부로 소속시켰는데, 경복궁으로 천궁할 때 규장각의 이문원은 영추문 안 동북쪽에 지은 건물로 옮기고, 어제·어필·어진·선원보 등 봉모당 자료는 건춘문 밖의 옛터에 세운 종친부로 옮겨졌다.

그 뒤 갑오경장 때는 직제개편에 따라 ‘규장원’으로 개칭되어 궁내부에 소속하였으며, 종래 종친부가 분리, 관장하던 업무가 다시 환원되었다. 그 뒤 명칭과 직제가 자주 개정되었는데, 1908년에는 규장각 기구가 분과제도(分課制度)로 개편되어 전모과(典謨課)·도서과(圖書課)·기록과(記錄課)·문서과(文書課)의 4개과가 설치되었다.

그 중 전모과는 ① 선원보첩과 돈녕보첩(敦寧譜牒)의 편찬, 수정 및 보관, ② 역대 임금의 어제·어필·어장·어진의 도사(圖寫) 및 보존, ③ 봉심 및 제전의 참여 등 종래의 봉모당과 종친부의 업무를 모두 관장하였다.

전모과가 일제강점 직전까지 소장한 전자료는 ≪봉모당급봉모당후고봉장서목 奉謨堂及奉謨堂後庫奉藏書目≫ 3책, ≪봉모당책보인신목록 奉謨堂冊寶印信目錄≫ 1책, ≪보각봉장품목록 譜閣奉藏品目錄≫ 1책에 각각 수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1911년 창덕궁 옛 이문원의 대유재(大酉齋)와 소유재(小酉齋) 자리에 새로 건물을 지었다.

아치형의 운한문(雲漢門)을 남쪽의 초입에 남향으로 세우고, 그 북쪽에 보각(譜閣), 그리고 좀 떨어져서 봉모당을 역시 남향으로 붉은 벽돌로 지어 장서를 나누어 간직하게 하였다. 보각에는 보첩류가 간직되고, 봉모당에는 보첩류를 제외한 모든 왕실자료가 간직되었다.

그것이 광복 후 1969년 7월에 왜식일소의 문화정책에 따라 철거되고, 그 자료가 분산 관리되었는데, 그 중 전적은 종묘를 거쳐 창경원 안에 있던 장서각으로 옮겨져 다른 궁내부장서와 합쳐졌으며, 그것이 1972년에 정리되어 ≪장서각도서한국판총목록 藏書閣圖書韓國版總目錄≫ 및 그 보유편으로 출간되었다.

그 장서와 목록이 1981년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으로 이관될 때 국가지정의 전적은 국립중앙박물관, 궁중관계자료 중 155종 340책은 문화재연구소 도서실로 각각 보낸 다음 인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문헌

『정조실록』
『철종실록』
『고종실록』
『순종실록』
『일성록』
『규장각지(奎章閣志)』
『대전회통(大典會通)』
『궁궐지(宮闕志)』
『한경식략(漢京識略)』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규장각일기(奎章閣日記)』
「장서각고-봉모당의 연혁·기능 및 그 장서를 중심으로-」(천혜봉, 『동교민태식박사고희기념유교학논총』, 1972)
「규장각도서의 변천과정에 대한 연구」(신용하, 『규장각』 5, 1981)
『장서각의 역사와 자료적 특성』(천혜봉·윤병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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