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행은 도쿠가와(德川家康)가 오사카(大阪)를 평정한데 대한 회답사행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을 데려오는데 더 큰 목적이 있었다.
1617년(광해군 9) 7월부터 11월까지 5개월간의 기록으로 일기와 부록으로 되어 있다. 일기의 내용은 포로자들의 생활과 그들을 데려오는 데 얽힌 사연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때 대마도 왜인들은 포로 반환을 그들의 경제적 미끼로 생각하고 사행을 찾아오는 포로들을 제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어려운 사정을 들어 귀환을 주저하게 하기도 하고, 돌아가면 죽이거나 아니면 노비로 삼는다고 거짓 선전을 하는 등 간교를 부려 어려움을 겪었다.
또 포로 자신들도 어려서 포로가 되어 온 사람은 언어와 거동이 불편하고, 이미 일본인과 결혼해 생활이 정착되었거나 일본인에 매여 있는 등 대부분 돌아갈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그런 사람은 이 책에서 인적 사항과 그 사정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사행들은 포로들의 명단을 가지고 직접 나서서 찾기도 하고 일본인 주인과 담판하는 등 그 수를 늘리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였다.
또 국서에 쓴 어휘와 관백이 세 사행에게 준 은화가 문제가 되었는데, 국서 내용은 조선 사행의 요구대로 수정되었고, 은화는 포로송환경비로 쓰도록 대마도주에게 되돌려 주었다.
또 시송선(時送船 : 使行案內에 대한 恩資)의 물량이 적다고 하여 논란이 되었으며, 일본 집정(執政)이 대마도인에게 “너희들은 조선 사람이니 마땅히 조선 일에 힘쓰라.” 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부록에는 일본의 지리·물산·풍속·형정(刑政)·관제·전제·연대기 등을 기록하였다. 특히 연대기에 응신왕(應神王) 22년에 신라군이 쳐들어와 일본이 화친하고자 백마를 잡아 맹세하고, 그 말을 묻은 백마분을 아카마노세키(赤間關) 동쪽의 구릉에 썼다고 소개하였다.
저자는 이 일을 추적해 자세히 알았으나 그 내용을 기록할 수 없는 사정이 있어 따로 계초(啓草)를 만들어 올리겠다는 흥미 있는 기록도 있다. 기록으로는 이 책 외에도 정사(正使) 오윤겸(吳允謙)의 ≪동사상일록 東槎上日錄≫이 있으나 이보다 소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