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들은 일정한 외형을 가지고 있는 물체에 대해서 생활주변에서 누구나 볼 수 있는 물체의 크기와의 비교로 그 부피를 사람들에게 알려 왔다. 즉, 큰 것은 동산이나 집채와 비교했고, 작은 것은 머리통이나 주먹의 크기와 비교하였다.
부피에 대한 이러한 비교는 정확성이 요구되지 않았을 때의 부피에 대한 표현법이었다. 그러나 농경생활을 하기 시작한 이후 곡물의 양을 비교적 정확하게 부피로 표시할 필요성이 생기게 되자, 우리 조상들은 장년 남자의 두 손을 모아 담긴 곡물량을 표준하여 분량을 계량하기 시작하였다.
인지가 발달하여 용기(容器)를 만들게 되자 곡물량을 계량하는 표준양기(標準量器)를 만들게 되었다. 그 최초의 양기가 됫박인데, 그 용적은 두 손을 모아 담긴 양과 같게 정했으며, 그것이 승(升)이다.
따라서 승(升)이란 글자는 두 손을 모았을 때의 형태인 {{#183}}가 {{#184}}이며, 거기에 곡식[禾穀]의 이삭을 표시하는 {{#185}}자를 더하여 升자가 된 것이다. 그 부피는 약 313㎤ 정도이다. 그 양의 10배가 말, 100배가 섬[石]이다.
우리 조상들은 곡물량을 나타내는 표준량으로 석(石)단위를 사용하였으며 이는 재산을 표시하는 단위로도 사용되었다. 되·말·섬의 단위가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선사시대인데, 그것은 늦게 잡아도 기원전 4세기 이전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에는 중국에서 10두량인 곡(斛)의 단위가 들어와 1곡은 열 말, 1석은 열댓 말로 통용되었다. 『경국대전』에 “소곡(小斛)은 평석(平石), 대곡(大斛)은 전석(全石)”이라 기술되고 있는데, 이 단위 명도 그러한 영향 때문이다. 세종 이전에 사용하던 되·말·곡은 입방체표준양기를 썼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직방체표준양기로 바뀌었다. 곡물을 계량했을 때에는 모두 평석을 1석이라 하였다. 이때의 1석의 부피는 89,464㎤이었다. 이것이 1902년부터 다시 바뀌어서 일본식 10두량이 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의 석이라는 부피단위는 독특한 것으로 그 관습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