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중요한 역사기록과 전적이 불타자 병화(兵火)가 미치지 못하는 깊은 산지에 사고를 옮기고 이를 지키는 데 부근의 승려들을 동원하게 되었다.
이는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실록을 영변 묘향산에 있는 보현사(普賢寺)에 보관하고 지키게 하였던 데서 비롯되었고, 그 뒤 사고가 있었던 태백산사고는 각화사(覺華寺), 적상산사고는 안국사(安國寺), 정족산사고는 전등사(傳燈寺), 오대산사고는 월정사(月精寺)로 하여금 수호를 맡게 하고, 그곳의 주지를 총섭으로 삼아 위전(位田)을 주어 경제적 지원을 하였다.
사고는 참봉이 수복군(守僕軍)을 거느리고 관리 · 수호를 맡으며, 한편으로는 총섭을 두어 승군을 거느리고 지키게 하는 이중조직으로 보호되었는데, 사고마다 시기에 따라 지키는 인원이 달랐다.
적상산사고의 경우 안국사의 주지가 총섭이 되어 대장(代將) · 화상(和尙) 각 1인씩과 승군 24인이 있었던 기록이 있고, 오대산 · 정족산사고에는 각각 승군 20인 ·50인이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들 승군의 최고지휘 · 감독자가 총섭이었다. → 총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