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사총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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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사고(史庫)와 선원각(璿源閣)을 지키기 위해 부근의 사찰 주지(住持)에게 수호하게 하고 내린 칭호.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차용걸 (충북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5년 06월 11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 사고(史庫)와 선원각(璿源閣)을 지키기 위해 부근의 사찰 주지(住持)에게 수호하게 하고 내린 칭호.

내용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중요한 역사기록과 전적이 불타자 병화(兵火)가 미치지 못하는 깊은 산지에 사고를 옮기고 이를 지키는 데 부근의 승려들을 동원하게 되었다.

이는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실록을 영변 묘향산에 있는 보현사(普賢寺)에 보관하고 지키게 하였던 데서 비롯되었고, 그 뒤 사고가 있었던 태백산사고는 각화사(覺華寺), 적상산사고는 안국사(安國寺), 정족산사고는 전등사(傳燈寺), 오대산사고는 월정사(月精寺)로 하여금 수호를 맡게 하고, 그곳의 주지를 총섭으로 삼아 위전(位田)을 주어 경제적 지원을 하였다.

사고는 참봉이 수복군(守僕軍)을 거느리고 관리 · 수호를 맡으며, 한편으로는 총섭을 두어 승군을 거느리고 지키게 하는 이중조직으로 보호되었는데, 사고마다 시기에 따라 지키는 인원이 달랐다.

적상산사고의 경우 안국사의 주지가 총섭이 되어 대장(代將) · 화상(和尙) 각 1인씩과 승군 24인이 있었던 기록이 있고, 오대산 · 정족산사고에는 각각 승군 20인 ·50인이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들 승군의 최고지휘 · 감독자가 총섭이었다. → 총섭

참고문헌

  • -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

  • - 『적성지(赤城誌)』

  • - 『강화부읍지(江華府邑誌)』

  • - 「조선조사고(朝鮮朝史庫)의 장서관리(藏書管理)」(배현숙, 『규장각(奎章閣)』2, 1978)

  • - 「조선조사고(朝鮮朝史庫)의 장서관리(藏書管理)」(배현숙, 『규장각(奎章閣)』2, 1978)

  • -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의 연혁(沿革)과 사고지현황(史庫址現況)」(강영철, 『사고지조사보고서(史庫址調査報告書)』, 1986)

  • -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의 연혁(沿革)과 사고지현황(史庫址現況)」(신재홍, 『사고지조사보고서(史庫址調査報告書)』, 1986)

  • - 「오대산사고(五臺山史庫)의 연혁(沿革)과 사고지현황(史庫址現況)」(김용곤, 『사고지조사보고서(史庫址調査報告書)』, 1986)

  • - 「강화사고(江華史庫)의 연혁(沿革)과 사고지현황(史庫址現況)」(정태헌, 『사고지조사보고서(史庫址調査報告書)』,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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