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사고는 조선 후기 실록과 같은 국가 기록물을 보관 · 관리하던 외사고(外史庫)의 하나이다. 임진왜란 직후 새롭게 제작한 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1606년(선조 39) 오대산 월정사 부근에 설치되었다. 오대산사고본 실록은 1913년 동경 제국 대학 도서관으로 반출되어 1923년 관동 대지진 당시 대부분 소실되었다. 화를 면한 실록 가운데 27책은 1932년 경성제국대학에 이관되었다가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이어졌다. 2006년, 2018년 추가로 반환이 이루어져 현재 총 75책의 오대산사고본 실록이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오대산사고(五臺山史庫)는 조선 후기에 실록(實錄)을 비롯하여 국가의 주요한 역사 기록물을 보관 ‧ 관리하던 외사고(外史庫)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주에 있던 사고를 제외한 3곳의 사고가 모두 병화를 입게 됨에 따라 전란 이후에는 외사고를 산간의 오지나 도서 지역으로 이설하였다. 이 사고는 당시 외사고 입지 선정에 있어 사적의 이용과 관리의 효율성을 중요시하였던 입장이 사적의 안전을 최우선시하는 방향으로 전환됨에 따라, 전주 사고본 실록을 저본으로 새롭게 제작한 실록을 안전하게 분산하여 보관하기 위해 설치한 4곳의 외사고 가운데 하나이다.
이보다 앞서 1605년 10월, 재인쇄된 실록의 교정쇄본을 봉안할 장소로 오대산 상원사(上院寺)가 선정되었다. 그러나 월정사 부근에 사각(史閣)을 건립하여 실록을 보관하기로 방침을 변경함에 따라 1606년(선조 39) 월정사(月精寺) 북쪽에서 10리 떨어진 남호암(南虎巖) 기슭에 오대산사고를 설치하였다. 오대산사고의 수호 사찰(守護寺刹)인 월정사는 사고에서 너무 떨어져 있어 실제로는 암자 격인 영감사(靈鑑寺)에서 수호를 하였다. 따라서 영감사를 일명 사고사(史庫寺)라 하기도 하였다.
1603년(선조 36) 7월부터 1606년 3월까지 진행된 실록 복구 사업을 통해 태조명종대의 실록 4부가 재간행되었으나, 전란 직후 재정의 궁핍으로 인하여 이 가운데 3부만 정본(正本)으로 인쇄하고, 나머지 1부는 최종 교정쇄본을 장정(裝幀)하여 정본을 대신하도록 하였다. 1606년 당시 오대산사고에 봉안된 실록은 태조명종실록 교정쇄본이다. 이후, 1616년(광해군 8)에는 『선조실록』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1653년(효종 4)에는 『인조실록』을, 1657년에는 『선조수정실록』을, 1661년(현종 2)에는 『효종실록』을, 1678년(숙종 4)에는 『광해군일기』를, 1728년(영조 4)에는 『숙종실록』을, 1732년에는 『경종실록』을, 1805년(순조 5)에는 『정조실록』을 봉안하였다.
실록 포쇄(實錄曝曬: 실록책을 바람에 쐬고 햇볕에 쬐는 것)는 수시로 행해져 정확한 횟수는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형지안(形止案)에 근거해 볼 때, 약 59회 행해졌다. 사고를 관리하는 책임은 참봉(參奉)에게 있지만, 사고 수호의 책임은 실록수호총섭(實錄守護總攝)에게 있었다. 오대산 사고 실록수호총섭은 월정사의 주지였다. 이 사고를 설치할 때에 수호군(守護軍) 60명, 승군(僧軍) 20명이 맡아 지켰다.
1910년 국권 상실 후, 오대산사고의 서책은 이왕직도서관(李王職圖書館)에서 관리하였다. 이듬해인 1911년 3월, 조선총독부 취조국(取調局)에서 이 서책들을 강제로 접수했다가 1913년 10월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부속도서관에 기증되었다.
그러나 1923년 9월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으로 이 서책들이 대부분 소실되고 당시 대출 중이었던 45책만이 화를 면하였다. 소잔본(燒殘本) 가운데 27책은 1932년 5월에 경성제국대학에 이관되어 이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이어졌다. 2006년초 동경대학도서관 귀중 서고에 오대산사고본 실록의 일부가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2006년 7월 47책이 반환되었으며, 2018년 1책이 추가로 환수되었다. 현재 총 75책의 오대산사고본 실록이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