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서법은 고려 공민왕 18년(1369)에 이색(李穡)이 지공거(知貢擧)를 맡아 처음 실시하였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문과의 식년시·증광시·별시·정시에서 제술 시험의 답안에만 적용하였다.
과거 응시생들이 시권(試券)을 수권관(收券官)에게 제출하면, 수권관은 등록관(謄錄官)에게 넘긴다. 등록관은 이들 시권의 처음과 끝에 일련 번호를 매기고 또 감합(堪合)이라고 쓴 뒤, 봉명(封名) 부분과 답안 부분을 절단한다.
봉명이란 응시자가 시험 전에 자기가 쓸 시지(試紙)를 구입해 자신의 관직·성명·나이·본관·주소, 아버지·할아버지·증조부의 관직 및 이름, 외할아버지의 관직·성명·본관을 다섯줄에 걸쳐 쓴 뒤 그 위에 풀로 종이를 붙여 보이지 않도록 봉한 부분으로서 피봉(皮封) 또는 비봉(秘封)이라고도 하였다.
이 봉명 부분을 봉미관(封彌官)이 받아 별도의 장소에서 기다리는 동안, 등록관은 30∼50인의 서사인(書寫人)을 동원, 답안을 붉은 글씨로 베끼게 하였다. 이 때 응시자가 쓴 본래의 답안을 본초(本草), 베낀 답안을 주초(朱草)라 하며, 주초할 때 농간을 부린 것이 탄로나면 유삼천리(流三千里)의 형에 처해졌다.
역서가 끝난 본초와 주초가 사동관과 지동관(枝同官)에게 넘겨지면, 사동관은 본초를 소리내어 읽었다. 그리고 지동관은 주초를 보면서 잘못 베낀 데가 없는지 확인한 뒤, 주초만 시관(試官)에게 보내 채점하도록 하였다.
시관이 채점 도중 주초의 내용에 혹 잘못 베끼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가는 곳이 있어 부득이 대조·확인해야 할 경우는 반드시 공개된 장소에서 사헌부 관원의 입회 하에 행해야 하였다. 정시(庭試) 및 전시(殿試)의 경우는 사동관과 지동관에게 다시 확인하도록 한 다음, 채점하였다.
사동관·지동관은 성균관 관원 중에서 차출하도록 했는데, 1835년(헌종 1) 역서법의 폐지와 함께 그 임무도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