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 3·1운동

  • 역사
  • 사건
  • 일제강점기
1919년 3·1운동 때 경상남도 사천시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김진봉 (충북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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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19년 3·1운동 때 경상남도 사천시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내용

1919년 3월 18일의 진주의거에 참여하였던 황순주(黃順柱)·박기현(朴基玄)·김종철(金鍾喆) 등 3명은 강달영(姜達永)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얻어와서, 3월 21일의 사천공립보통학교졸업식이 끝나는 시간에 의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윤조(李允祚)가 졸업식 전에 태극기를 꺼내들고 독립만세를 불렀기 때문에 만세시위는 예정보다 앞당겨 전개되었다.

이 때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하여 주동인물 3명이 구금되었다. 그 뒤 4월 14일중선포(中宣浦)의 도로공사노역을 마치고 귀가하던 사천면 두량리의 유승갑(柳承甲)과 손계묵(孫季默) 등이 도로공사 인부 100여 명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외치자 인부들이 일제히 호응, 만세시위대는 사천읍으로 향하였다.

이 때 급거 출동한 일본헌병에 의하여 주동자가 잡히고 많은 사람이 부상하였다. 한편, 삼천포에서는 3월 25일박종실(朴琮實)과 김우열(金瑀烈) 등의 주동으로 1,000여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하여 주동인물은 붙잡히고 시위대열은 해산되었다.

이 때 한국인 형사 강일선(姜日善)은 구속된 주동인물들에게 온갖 학대와 횡포를 다하였으며, 이에 격분한 주민들은 26일 다시 봉기하였다.

그 밖에 곤양면 송전리에서는 3월 13일, 4월 6일, 4월 19일에 걸쳐 만세시위를 전개하였고, 서포면 구평리에서도 4월 10일, 4월 16일송찬홍(宋贊洪)과 이주효(李柱孝) 등의 주동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참고문헌

  • - 『독립운동사자료집』 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 - 『독립운동사』 3(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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