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이래 사타의 위치 비정과 관련하여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학자들은 음상사에 기준하여 사타의 위치를 현재의 경북 상주, 경남 사천, 경북 인동, 전남 순천 등 여러 곳에 비정하여 왔으며 근년에는 순천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사타는 『일본서기』 게이타이[繼體] 6년 겨울 12월조에 기록된 임나(任那) 4현 가운데 한 곳이다. 통상 지명으로 파악하지만 순천 일원에 위치한 소국의 이름으로 보기도 한다. 사타에 관한 기록이 부족하여 상세한 검토가 어렵다.
다만, 사타를 순천의 옛이름인 삽평(㰱平) 혹은 사평(沙平)과 관련지워 순천으로 비정하는 견해, 그리고 그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동천 일대의 운평리고분군을 사타의 유력층 묘역으로 보는 견해가 있어 주목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사타는 5세기 후반 대가야가 섬진강 하류를 장악하였을 때 대가야권에 포함되었다가 백제 무령왕의 재위 연간에 해당하는 6세기 초 백제의 변경으로 편입되었다고 한다.
사타의 위치가 어디인지에 대해 아직 학계에서 일치된 견해는 없다. 그 때문에 임나 4현 할양 기사에 대한 해석 또한 다양하다. 다만 사타의 중심지를 순천 일원으로 보고 그곳 고고학 자료의 변천 양상을 통해 사타의 정치적 동향을 파악하려는 연구가 시작되고 있다. 향후 관련 연구가 한층 심화되면 임나 4현 할양 기사의 실체가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