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에서는 성산가야의 위치를 "지금의 경산(京山)이니 벽진(碧珍)이라고도 한다."라고 설명하였다. 경산 혹은 벽진은 지금의 성주를 가리킨다.
성산가야가 언제 형성되었는지, 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고학 자료를 볼 때 성주에 가야 소국이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증거는 없으며, 오히려 일찍부터 신라의 지방으로 편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주에 유력한 세력이 있었음은 성산동고분군에 잘 드러난다. 무덤을 축조한 방식이나 장송 의례, 출토된 유물의 양식 등을 보면 가야와 유사하다기보다는 신라적인 색채가 완연하다. 특히 경주에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관식, 귀걸이, 허리띠 장식, 장식대도 등이 출토되며, 유물 가운데 다수를 이루는 토기가 신라의 지방 양식으로 규정할 수 있을 정도로 신라적 특색을 갖추고 있다.
학계에서는 『삼국유사』 5가야조의 성산가야 관련 기사를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에 부회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기록이 남게 된 것은 관련 전승이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 그에 따라 학계에서는 성주 지역이 일시적으로 인접한 대가야권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하기도 한다.
성산가야가 실제 있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다. 그러나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 혹은 고려시대에 성주를 가야권으로 파악하려는 인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