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가야 ()

고대사
지명
삼국시대,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 일원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가야 소국.
이칭
이칭
벽진가야(碧珍加耶)
지명/고지명
지역
경상북도 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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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성산가야는 삼국시대에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 일원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가야 소국이다. 『삼국유사』 5가야조에 등장하는 가야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성주 일원에서 발굴된 고고학 자료는 신라 양식으로만 이루어져 있어서 실제 성산가야가 성주에 있었는지를 둘러싸고 논란이 있다.

정의
삼국시대,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 일원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가야 소국.
위치

『삼국유사』에서는 성산가야의 위치를 "지금의 경산(京山)이니 벽진(碧珍)이라고도 한다."라고 설명하였다. 경산 혹은 벽진은 지금의 성주를 가리킨다.

형성 및 변천

성산가야가 언제 형성되었는지, 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고학 자료를 볼 때 성주에 가야 소국이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증거는 없으며, 오히려 일찍부터 신라의 지방으로 편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주에 유력한 세력이 있었음은 성산동고분군에 잘 드러난다. 무덤을 축조한 방식이나 장송 의례, 출토된 유물의 양식 등을 보면 가야와 유사하다기보다는 신라적인 색채가 완연하다. 특히 경주에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관식, 귀걸이, 허리띠 장식, 장식대도 등이 출토되며, 유물 가운데 다수를 이루는 토기가 신라의 지방 양식으로 규정할 수 있을 정도로 신라적 특색을 갖추고 있다.

학계에서는 『삼국유사』 5가야조의 성산가야 관련 기사를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에 부회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기록이 남게 된 것은 관련 전승이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 그에 따라 학계에서는 성주 지역이 일시적으로 인접한 대가야권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하기도 한다.

의의 및 평가

성산가야가 실제 있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다. 그러나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 혹은 고려시대에 성주를 가야권으로 파악하려는 인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유사』

논문

김세기, 「고분자료로 본 삼국시대 성주지역의 정치적 성격」(『신라문화』 43,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2014)
주보돈, 「고대사회 성주의 향방(『신라문화』 42,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2013)
이형기, 「성산가야연맹체의 성립과 그 추이: 가야사에서의 지역연맹체에 대한 일시론」」『민족문화논총』18ㆍ19,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8)
김태식, 「5세기 후반 대가야의 발전에 대한 연구」『한국사론』 12,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85)
집필자
이한상(대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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