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기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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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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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생존한 관료 박영효가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후 1882년에 작성한 견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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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생존한 관료 박영효가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후 1882년에 작성한 견문록.
내용

이 사행은 같은 해 6월에 일어났던 임오군란으로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 체결된 제물포조약에 의해 성사된 수신(修信)의 의미와, 한편으로는 김옥균(金玉均)이 사행의 일원으로서 임금의 은밀한 교지를 수행하는 임무를 띤 것이었다.

이 일기는 같은 해 8월부터 11월까지 4개월간의 기록으로 주요 사건이 있는 날만 썼다. 그리고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비교적 자세히 썼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일본 정부와 주고받은 공문은 원문을 그대로 소개했는가 하면, 외국사신들과 만난 기사도 주요 내용은 물론 앉은 배치도까지 그려져 있다.

이 일기의 주요 내용을 보면, 첫째 박영효가 일본에 갈 때 배 안에서 태극기를 처음으로 고안해 사용했는데, 그 제조 경위가 자세히 밝혀져 있다.

둘째 일본과의 수호면(修好面)에서 앞서 체결한 제물포조약의 미비점을 보완하고, 손해배상금 상환기한을 5년에서 10년으로 연기하도록 고친 사실을 기록하였다.

또한 우리나라의 경상도 세수제세(歲收諸稅) 중에서 순금·은으로 교환해 일본의 은화폐든지 금화폐의 양목(量目)에 비추어 해마다 5만원을 지불하며, 그 방법은 두 차례로 나누어 조선 원산항(元山港)에 있는 일본영사관으로 수송시키기로 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셋째 이들 일행 가운데는 2년 뒤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당(開化黨)의 김옥균·서광범(徐光範)과 그 반대파인 수구당(守舊黨)의 거두 민영익(閔泳翊)도 수행하였다. 이로 보아 당시 일본의 여러 발전상이 우리나라의 정치 변혁에 여러 가지로 작용했으리라는 면을 추측하는 자료를 담고 있다.

한편, 두개의 속약(續約)을 정정(訂定)한 내용도 담고 있는데, 제1관은 원산·부산·인천 항구의 이정(里程)을 조선의 이정법에 의해 사방 각각 50리씩으로 하고, 2년 뒤 다시 각각 100리씩으로 한다.

제2관은 일본의 영사·공사와 그 수행원의 가족이 우리나라 내지(內地)의 각 곳에 유람하는 것을 허가하는데, 유람하는 지방을 지정해서 예조로부터 증명서를 주고 지방관은 증명서를 조사해 호송해야 한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유학생도 약간 명을 인솔해 가서 입학시키고 이전에 가 있던 유학생을 데리고 왔다. 유학은 주로 어학교(語學校)와 사관학교(士官學校)가 주였는데, 윤치호(尹致昊)도 이 때 유학했고, 일본에 있는 동안 일왕의 생일을 맞아 여러 외국 특사들과도 빈번하게 접촉했다는 내용도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대일 관계의 기본 사료가 될 뿐 아니라 초기의 관세 문제, 일본의 수로(水路) 및 풍속과 국기(國旗)의 제정 경위 등을 밝혀 주는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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