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주 3·1운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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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사건
1919년 3·1운동 때 평안북도 삭주군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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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19년 3·1운동 때 평안북도 삭주군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
내용

이승훈(李昇薰)은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산악 지대 동포들도 민족적 거사에 참여시키기 위해 의주군 월화면 교회 목사 송문정(宋文正)을 삭주로 밀파하여 사전에 만세운동을 협의토록 하였다.

한편, 천도교측에서도 의주의 최석련(崔碩連) 등을 통해, 이미 3월 1일에 독립선언서를 보냈다. 그래서 천도교인 장대길(張大吉)은 교인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등사, 복제하여 각 면에 전달하고, 3월 5일 오후 2시를 기하여 각 면별로 만세를 부르기로 계획하였다.

같은 날 오후 2시, 읍내에서는 기독교인·천도교인·주민 3,000여 명이 집결한 가운데,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출동한 일본 헌병대와 충돌하여 4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20여 명이 잡혔다.

3월 9일 읍내에서는 기독교인 50여 명이 다시 만세 시위를 벌였고, 3월 31일과 4월 1일에도 수천 명의 군중이 헌병 분견소를 포위하고 유리창을 부수는 등 격렬한 만세 시위 운동을 벌였다.

이렇듯 3월 31일부터 계속하여 삭주군 외남면 대관리에서 수천 명이 되는 군중이 격렬한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자, 일본군은 4월 5일삭주읍내의 헌병 5명을 증파하였다.

4월 6일 6,000∼7,000명 군중 가운데 약 200명으로 조직된 결사대가 앞장서 저지하는 일본군에 대항하자, 일본군은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다. 이 때 현장에서 6명이 즉사하고 40명이 잡혔다.

한편, 4월 11일 새벽, 읍내 기독교회당에서는 돌연 화재가 발생하여 교회당이 전부 타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소행은 정주에서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의 독립 만세 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복행위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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