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유화가 ()

산유화가
산유화가
국악
작품
국가유산
향토민요 「메나리」를 한자로 표기한 악곡명.
이칭
이칭
메나리, 미나리, 산야, 산유해
작품/전통음악
전승자
김영구
전승지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
시도무형유산
지정 명칭
산유화가(山有花歌)
분류
무형유산
지정기관
충청남도
종목
충청남도 시도무형유산(1982년 12월 31일 지정)
소재지
충청남도 부여군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산유화가」는 향토민요 「메나리」를 한자로 표기한 악곡명이다. 강원도와 영남의 「미나리」, 「메나리」, 「산야」[「어사용」], 서도의 「메나리」 등이 모두 이와 관련이 있다. 「산유화가」는 농가에서 일을 하며 부르는 「상사소리」 계열의 모심는 소리다.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의 「산유화가」는 ‘상사뒤야’라는 후렴이 붙어 여타 「메나리」 계통의 후렴 없는 노래와는 구별된다. 「긴 산유화가」는 중모리장단의 리듬형으로 되어 있으며, 「자진 산유화가」는 빠른 중중모리 리듬형이다. 1982년 12월 31일 충청남도 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정의
향토민요 「메나리」를 한자로 표기한 악곡명.
연원

「산유화가(山有花歌)」는 멸망한 백제의 유민들이 망국의 한을 담아 부른 노래라고 한다. 가사는 잃었으나 곡조는 오래 전했다고 한다. 조선 숙종(肅宗) 때 경상북도 선산(善山)의 열녀 향랑(香娘)이 자결하면서 지은 노래 역시 「산유화가」로 전한다.

이밖에, 조선 후기 호서 · 호남 · 영남 지방과 황해도 · 평안도의 서도 지역의 농사 소리를 「산유화가」로 적은 기록이 적지 않다. 지역과 기능의 경계를 넘나들며 오랫동안 전승되어 온 역사가 깊은 소리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메나리」, 「미나리」, 「산야」, 「산유해」라고도 한다.

내용

「산유화가」에서 ‘산유’(山遊, 山有)는 ‘뫼’와 ‘노리’를 한역한 말로 뫼노리, 메나리, 미나리 등이 「산유화가」로 기록되었다. 고문헌에는 대부분 한자어인 ‘산유화(山有花)’로 나타나지만 ‘머너리’, ‘메너리’, ‘메ᄂᆞ리’ 등의 한글 표기도 더러 보인다. 나무꾼 소리는 오늘날에도 「산유」, 「산유해」, 「산융해」 등 흡사한 이름으로 남아 있다. 경상도 메나리조를 경상도 ‘산유화제’라고 한 사실에서도 ‘산유화’는 곧 ‘메나리’로 이해된다.

「산유화가」는 조선 후기 문집을 통해 농가에서 일을 하며 부르는 노래였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모내기 소리, 나무꾼 노래[樵歌], 나물 캐는 노래 등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가 부르는 소리로 나타난다. “물이 고인 논에서 산유화가 울린다”[권극중(權克中), 「산유화」]거나 “(백제의) 남겨진 곡을 농녀(農女)가 부른다”[이사질(李思質), 「어난난곡(於難難曲)」], 혹은 “수천종류의 농요를 들었으나 산유화를 즐겨 듣는다”[김창흡(金昌翕), 「죽림정십영(竹林亭十詠)」] 등의 기록에서 볼 수 있다. 나무하는 초동의 노래나 나물캐는 소리 「산유화가」도 간혹 등장한다.

「산유화가」는 충청도 · 전라도 · 경상도와 평안도 · 황해도 등지에서 두루 불린 사실도 드러나는데, 그것은 현재 전승되는 「메나리」의 존재 양상과 다르지 않다. 오늘날 강원도의 「미나리」, 경상도의 「메나리」와 「어사용」 계통의 노래가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동쪽 지역까지 확산되어 나타나고, 서도의 농사소리 「메나리」 역시 20세기 전반(前半)까지 활발하게 전승되었다.

「메나리」 계통 노래들은 공통적으로 후렴을 갖지 않으며 일정한 박자나 장단이 없어 느리고 자유롭게 부르는 특징이 있다. 이는 과거 「산유화가」의 기록에 보이는 탄식과 슬픔의 노래라는 정서와 부합하는 면이 있다.

충청남도 부여의 「산유화가」가 백제의 노래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애초의 모습은 알 길이 없다. 오늘날 전승되는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의 「산유화가」는 ‘상사뒤야’라는 후렴이 붙어 있는 「상사소리」의 일종으로 여타 「메나리」 계통의 후렴 없는 노래와는 구별되는 모습이다. 1920년대 채록되어 알려지게 된 이 「산유화가」는 메기는소리가 ‘산유화야 산유화야’로 시작되며 모심을 때 부르는 소리다.

「긴 산유화가」
(받) 에헤헤 아아아에헤 에헤 에헤여루 상사뒤여
(메) 산유화야 산유화야/ 궁야평 너른들에 논도 많고 밭도 많다/ 씨 뿌리고 모 옮겨 충실허니 가꾸어서/ 성실하게 맺어보세
(메) 산유화야 산유화야/ 입포에 남당산은 어찌그리 유정턴고/ 매년 팔월 십육일은 웬 아낙네 다 모인다/ 무슨 모의가 있다던고

「자진 산유화가」
(받) 어화 어화 상사디여
(메) 산유화야 산유화야 네 꽃피어 자랑마라
(메) 네 꽃피어 자랑마라 구십수광 잠깐 간다
(메) 구룡포 너른 들에 봇줌소리 한창이요

「긴 산유화가」는 중모리장단의 리듬형으로 되어 있으며 「자진 산유화가」는 빠른 중중모리 리듬형이다. 주변 지역 「상사소리」의 흐름과 잇닿아 있지만 남도 판소리의 영향을 받아 육자배기의 선율이 다소 섞여 있다.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의 「산유화가」는 1976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나와 알려지면서 1982년 12월 31일 충청남도 무형유산으로 인정을 받았다. 당시 홍종관의 소리를 박홍남(19202006)과 이병호(19261995)가 이으면서 전승에 합당하도록 정리했고 현재 김영구(金永九: 1946~ )가 그 맥을 잇고 있다. 오늘날 부여의 「산유화가」는 기존의 모심는 소리 외에도 논매기, 볏단쌓기, 타작하기[벼바심-나비질] 등 농사 과정에 불리는 일련의 소리를 묶어 「산유화가」로 전승하고 있다.

의의 및 평가

「산유화가」는 고문헌에 향토민요 혹은 노동요의 구체적 곡명으로 등장하고 있어 주목된다. 백제 유민이 부른 노래라 하여 특별히 문인들이 관심을 가졌고, 「향랑 설화(香娘說話)」가 겹쳐 수많은 한시가 지어지기도 했다. 17세기부터 드러나는 ‘메나리’의 존재와 노동요로서의 기능, 그리고 그 전승 지역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문자나 악보의 기록 없이 입으로 전해지는 노래의 생명력을 새삼 확인하게 되는 사례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원전

『숙종실록(肅宗實錄)』
『한청문감(漢淸文鑑)』
「박타령」(신재효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단행본

이소라, 『부여의 민요』(부여문화원, 1992)

논문

배인교, 「충남 부여군 세도면의 논농사소리와 산유화가」(『한국민요학』 28, 한국민요학회, 2010)
정한기, 「민요 산유화의 통시적 양상」(『고전문학과 교육』 17, 한국고전문학교육학회, 2009)
김인숙, 「서도 메나리에 관한 음악적 고찰」(『한국민요학』 23, 한국민요학회, 2008)
정한기, 「문집 소재 조선후기 민요자료에 나타난 민요의 통시적 양상」(『배달말』 40, 배달말학회, 2007)
강등학, 「<모심는 소리>와 <논매는 소리>의 전국적 판도 및 농요의 권역에 관한 연구」(『한국민속학』 38, 한국민속학회, 2003)
조재훈, 「산유화가 연구」(『백제문화』 7·8,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1975)
이보형, 「메나리조」(『한국음악연구』 2, 한국국악학회, 1972)
이재욱, 「소위 산유화가와 산유해 미나리의 교섭」(『신흥』 6, 신흥사, 1931)

인터넷 자료

관련 미디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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