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신은 1921년 3월 고베[神戶]에서 한신[阪神] 지방의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삼일청년회(일명 關西조선인삼일청년회)이다. 이 단체는 기독교의 예배전도를 구실로 결성한 후 배일사상선전에 노력했다. 그러나 별 다른 활동이 없던 중 1924년 고베초등학교 생도인 이중환(李重煥)이 새로 발회식을 거행하고 총본부를 오사카[大阪]에 두었다.
삼일청년회는 1924년 8월에 사상선전부를 설치하고 사상선전에 노력할 것을 결의한 후 다시 10월에 열린 최고간부회의에서 명실상부한 사상단체로 활동할 것을 결정했다. 이후부터 삼일청년회는 활동 방향을 ‘장래 조국을 독립시키는 것’으로 설정하고 식민지 해방운동을 개시했다.
그 대표적인 활동은 식민지해방강연·연설회 개최이다. 1924년 삼일청년회는 ‘약소민족 및 식민지해방강연연설회’를 개최해 그 첫 행사를 11월 15일 고베시에서 열었다. 그 후 이 연설회는 11월 22일 오사카, 11월 29일 교토[京都]로 파급되어 각각 강연연설회가 개최되었다.
이 단체는 1924년에 오사카에서 활동하는 사회주의자 기모토 쇼타네[木本正胤], 사토 도이치[佐藤藤一]과 관련을 맺고, 와다덴고로[和田傳五郞], 후지타 이찌로[藤田一郞]의 후원으로 수평사와 노동단체, 사회주의 일파와 제휴하기도 했다.
이후 삼일청년회는 청년단체로서의 활동에 만족하지 않고 조선노동자의 규합에 노력해 근로대중 해방을 고창하였다. 그리고 1925년 2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결성에 참가해 본격적인 연대투쟁을 전개했다.
동시에 지부 설치에도 나서 2월 16일에 나카미치(中道)지부 창립총회를 개최하고(상임집행위원 李中冠, 金致國, 집행위원 吳大漢 외 5명, 방면위원 金亨潤 외 5명), 17일에는 나카노쵸(中野町)지부 기성회(집행위원 裵敬藤, 文春和, 金浩鎭, 魏根浩)를 조직했다. 이러한 조직화의 뒤를 이어 삼일청년회라는 명칭을 삼일무산청년회로 개칭하고 강령과 회칙을 통해 본격적인 사회운동단체임을 천명했다.
1925년 3월 1일, 회원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삼일무산청년회 개편대회에서 결정한 강령은 ① 세계무산청년의 조직적 단결의 운동을 기한다. ② 합리적 협력사회를 실현하고 조선신인의 교양 및 투사의 수련을 도모한다. ③ 동족(同族) 특수한 처치에 감응(鑑應)하고 신흥계급의 모든 종류의 운동을 기한다 등이다.
이날 선출된 임원은 이중환, 박방(朴茫, 朴成俊), 김달환(金達桓), 신기천(辛基天), 김석(金碩), 신재용(辛載鎔), 은흑해(殷黑海), 어파(魚波) 등 8명이다.
삼일청년회는 1921년 종교단체의 성격으로 창립했으나 오사카 지역의 사회운동 및 노동단체와의 교류를 통해 반일반제운동을 전개하면서 사회운동단체로 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 삼일무산청년회 활동 내용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