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타현 조선인 노동자 학살사건은 1920년대 일본 니가타현에 있는 신월전력주식회사 수력발전소 공사장에서 일어난 조선인노동자 학살사건이다. 신월전력주식회사는 니가타현에 조선인과 일본인 노동자를 동원해 발전소를 건설하고 있었다. 그런데 강제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하다가 적발된 조선인노동자를 죽인 다음 강물에 던져 버린 일이 발각되었다. 현지조사를 통해 1일 17시간 노동 등 조선인노동자의 참상이 알려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 지역에서 조선인은 조선인 스스로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조선인노동조합이 탄생하게 되었다.
나카사카누마군 아키세이무라[秋成村] 소재 조선인노동자가 취로하는 공사장에서 강제노동을 강요한 후 고역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을 하다가 적발되면, 도망한 노동자를 여러 노동자가 보는 앞에서 육혈포로 쏘아 죽인 후 강물에 던져 버렸다는 것이다.
1922년 7월 말에 경찰서에서 이 사건을 조사할 때, 살해된 조선인노동자는 수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조사가 거듭되면서 사망자 수는 늘었다. 사건이 알려지자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기사를 보도한 동아일보의 발매를 금지하고 신문에 보도된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고 강변하였다.
그러나 8월 5일에 청년연합회 · 신생활사 · 개벽사 · 조선교육협회를 비롯한 각 단체 대표 50여 명이 종로중앙청년회관에 모여 니가타현 조선인학살사건조사회를 조직하고 진상조사에 착수함으로써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다. 조사회는 박희도(朴熙道) 외 9명으로 실행위원을 선정하고 7일에 조사위원 나경석(羅景錫, 羅公民)을 일본에 파견했다.
일본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들도 8월 3일, 토쿄[東京] 간다쿠[神田區] 소재 조선기독청년회관에 모였다. 여기서 20명의 위원을 뽑고, 9일에 다시 회의를 개최한 결과 김약수(金若水)를 대표로 조사를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현지에 파견했다.
또한 동아일보사에서도 이상협(李相協)을 특파원으로 파견해 사실 보도에 힘썼다. 이외에도 박열을 중심으로 하는 흑도회원들도 현지조사에 착수했다.
이와 같이 조사단과 특파원의 파견으로 사건 은폐가 불가능해지자 내무성(內務省) 경무국(警務局)은 성명을 통해 이 기회에 철저히 단속하겠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조사를 통해 조선인노동자들이 ‘지옥실’이라 불리우는 함바(飯場)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음이 알려지자 회사측은 도주를 예방하기 위한 조처였다고 변명했다.
현지조사는 조사단과 특파원 외에 경찰서 형사과장과 보안과장, 내무성 참사관, 일본토목회사 중역 등이 참가한 가운데 실시되었다. 이 조사를 통해 수천 척 높이의 골짜기에 매달린 철사줄 위에서 작업을 하는 조선인노동자의 참상이 극명하게 알려졌다.
이들은 계약 당시 미리 1인당 40원(圓)씩을 선불로 받고 하루에 8시간만 노동을 하며 1개월에 80원씩을 준다는 약속 아래 이곳에 왔다. 그런데 약속과는 달리 1일 17시간(오전 4시부터 오후 9시까지) 노동에 구타가 심하며 노동조건이 최악이어서 도망자가 속출하게 되었다.
이들은 위험한 공사일 도중에 발을 헛딛어 목숨을 잃는 경우도 허다하다는 것이다. 또한 중첩되는 청부관계로 인해 실제로 노동자는 하루 15전의 임금만을 받았음도 알려졌다.
이와 아울러 조선인노동자 학살의 내용도 밝혀졌다. 총으로 쏘아 절벽에 떨어뜨리는 경우도 있지만, 나체를 결박한 후 양회(洋灰)를 부어서 굳히거나 난자해 죽인 경우도 있었다는 것이다.
다각적인 조사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어느 정도의 조선인이 학살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채 현지조사는 종료되었다. 조선인사망자는 100여명 정도가 될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이러한 현지조사의 결과는 진상조사보고회나 연설회를 통해 일본 지역과 국내의 조선인들에게 알려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 지역에서 조선인은 조선인 스스로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조선인노동조합이 탄생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