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하몽(何夢).
보성중학교와 관립한성법어학교에서 수학하였고, 1909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게이오대학(慶應大學)에서 유학한 후 1912년 귀국하였다. 1913년부터 『매일신보』에서 기자수업을 받고 그 이후 편집국장, 발행인 겸 편집인 등을 맡았다. 그동안 번안소설을 발표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기자생활에서 물러나 신문관에 관여하였고, 선우일(鮮于日)과 함께 중국 봉천을 근거지로 한 국한문 일간지 『만주일보』를 발간하였다. 1919년 가을부터 『동아일보』 창간을 위해 노력하여 발행인 겸 편집인, 편집국장을 맡았으며, 1924년 3월까지 논설위원·사회부장을 지냈다.
1922년 4월 조선총독의 학정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함으로써 압수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1921년 한국인 신문잡지 대동단결을 목적으로 발기된 무명회 특별위원을 맡았고, 1922년 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주창하였다.
1924년 9월부터 『조선일보』에서 이사·고문으로 지내다가 1925년 9월 필화사건으로 퇴직하였다. 그동안 한국 최초의 신문연재 시사만화 「멍텅구리」를 연재하게 하였고, 획기적인 신문 쇄신을 단행하였다. 1925년 조선체육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 9월 『시대일보』를 인수하여 11월 『중외일보』로 제호를 바꾸어 속간하고 발행인 겸 편집인을 역임하였다. 1928년 쇼와대례기념장을 받았고, 조선신문연구회 고문으로 활동하였으며,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인과 조선박람회 평의원 겸 이사 등을 맡았다.
1930년 경성상공협회 상담역, 1933년 조선총독부 주도 아래 중앙진흥협회 이사로 활동하였다. 1933년 10월 『매일신보』에 입사하였고, 1940년 9월까지 이사로 일했다. 1938년 4월 『매일신보』를 『매일신보(每日新報)』로 개정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고, 이 해 12월 매일신보사에서 주간으로 간행한 『국민신보』 발행인이 되었다. 매일신보사에서 근무하는 동안 1934년 조선문기사정리기성회 위원, 만주 신경에서 한인들이 발간한 국문신문 『만몽일보』 간사 등을 맡았다.
1935년 ‘약 19년 동안 각 한글신문사를 전전하면서 반도 민중에게 총독 정치를 철저하게 이해시킴으로써 내선인(內鮮人)의 융합에 노력하는 등 조선통치를 위해 공헌한 공적이 실로 크다’고 인정받아 조선총독부시정25주년 기념표창을 받았다. 1936년 일본 정부의 언론통제정책에 적극 협력했던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의 흉상을 건설하는 일을 맡았고, 중추원 참의 박영철(朴榮喆)이 주도하던 친목단체인 구일회(九日會)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조선가요협회를 개편한 친일 단체 조선문예회 문학위원으로 뽑혔다. 또한 경성군사후원연맹 위원, 조선총독부 주최 각도 시국순회강연대 연사 등으로 활동하였다. 1938년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간이국어(일본어) 독본 보급반 편찬위원과 조선지원병제도제정축하회 발기인을 맡았고, 조선총독부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25개 신문사로 조직된 조선춘추회 발회식에 참석하였다.
1939년 일제가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결성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로 선임되었고, 그 기관지였던 『총동원』지 편찬위원을 맡았으며,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하여 평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일제의 전쟁동원정책에 협력하였다. 1945년 7월 국민의용대 조선사령부의 참여로 선임되었다.
해방 후 『매일신보』가 미군정에 인계될 당시 한때 부사장을 지냈고, 1947년 4월 자유신문사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49년 2월 25일 서울 창신동에서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에 소환되어 구속 수감 되었으나 얼마 후 풀려났다. 1955년부터 경기도지편찬위원회 부위원장 겸 상임위원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