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조선교육회라고 한다. 1922년 11월 한규설(韓圭卨) · 이상재(李商在) · 윤치소(尹致昭) · 김성수(金性洙) · 조만식(曺晩植) 등 47명이 ‘조선민립대학기성회(朝鮮民立大學期成會)’를 발기한 것이 계기가 되어 민족교육의 실현 욕구를 표면화 · 구체화시켜 결실을 본 것이다.
1923년 6월 23일 회장 한규설, 임원 이상재 · 윤치소 · 이달원(李達元) · 김계병(金桂秉)이 선임되어 재단법인 조선교육협회를 구성하였으며, 회원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 3 · 1운동 후 신교육에 대한 욕구가 커졌는데, 이는 공립학교 학생들의 적극적인 만세운동에 큰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전에는 민족의식이 소멸될까 우려해 일제가 세운 공립학교는 기피하는 경향이 많았으나, 이로써 관공립학교 지원자가 급증하였다. 그러나 그 수용 한계가 드러나자 사립학교 · 강습소 · 야학 등의 설치운동 및 각종 교육운동이 전개되었다.
문화정치기의 교육운동 특징은 교육 기회 균등을 위한 학교 증설, 한국인 교육의 차별 대우 폐지, 교육 용어의 일본어사용 중지, 한국사 학과목 개설 요구 등이었다. 이와 같은 시대적 요구를 전면적으로 수용한 것이 민립대학교 설치운동이었다. 회장단은 설립발기회에 조속한 시일 내에 1차로 문(文) · 법(法) · 경(經) · 이(理)의 4부 대학과 예과를 설치하고 400만원을 모금할 계획을 세웠다. 이어 3차에 걸쳐 총 1,250만원을 모금하기로 하고 7부 대학을 계획하였다. 9월 26일 회원 1,000여 명이 모여 조선교육회 창립총회를 열어 민립대학 설립을 재확인했는데, 이 운동에는 각계 각층, 심지어 친일 군수 · 도의원까지 참여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이것을 민족운동으로 파악하고 1923년 5월 ‘경성제국대학령’을 발표, 이어서 민립대학 모금운동을 방해하였다. 또한 민족 자본 형성이 미숙해 1차모금 목표도 달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192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 1926년 학부가 설치되자 민족교육운동은 크게 좌절되었다. 그 뒤 조선교육회는 각종의 운동회 개최 및 일인교사축출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1927년 민족단일당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됨으로써 조선교육회의 민족교육운동은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비록 민립대학설치운동은 실패하였으나 이로 인해 각종의 사설 교육기관이 급증하였고, 식민지 교육기관이기는 하나 최고학부로서 경성제국대학이 설치된 것은, 이상재가 “이것은 민립대학의 변형이다.”라고 하였듯이 이 협회의 영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