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기현(岐峴), 호는 포송(抱松). 경상남도 울산 출신. 젊어서 목포로 이주하여 살던 중 미 남 장로회 선교회 소속의 선교사 벨(Bell, E., 裵裕址)의 전도로 신자가 되었다.
1898년의 목포 양동교회(陽洞敎會) 설립에 기여하고 사회사업과 종교 활동을 전개하는 등 포교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목사 이경필(李敬弼), 장로 양경팔(梁景八), 서화일(徐化一), 박여성(朴汝成) 등 목포 기독교 인사들과 함께 자신의 집에 본부를 정하고 만세운동의 계획을 세웠으며, 거사일인 3월 21일 영흥·정명 두 학교의 학생들과 함께 대규모의 시위를 벌였다.
그는 볏섬에 감추어두었던 태극기 수 만장을 교인과 학생들에게 나누어주는 한편, ‘삼천만 동포의 봉기에 우리 목포 인들도 적극 호응하자.’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만세시위를 선도하였다.
이 때 일본경찰이 휘두르는 칼로 양팔에 중상을 입고 붙잡혔다. 수감된 지 반년 만에 상처가 매우 악화되어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이듬해 5월에 병사하고 말았다. 그는 목포의 만세운동을 기독교인 중심으로 전개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