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온숙(溫叔), 호는 인재(訒齋) 또는 학서(鶴西). 제조 서경주(徐景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서정리(徐貞履)이고, 아버지는 예조판서 서문유(徐文𥙿)이며, 어머니는 이상연(李尙淵)의 딸이다.
1725년(영조 1)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728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제수받은 뒤 이조좌랑·경연검토관·대사성·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1733년 이조참의가 되어 당시 정치의 폐단 10개조를 들어 시정할 것을 상소하였다.
즉, 국가운영의 원칙을 세우고, 기강을 바로잡으며, 어진 이를 등용하고, 정직한 관리를 표창하며, 인재를 뽑아 쓰고, 불쌍한 백성들을 구제하며, 국방에 힘쓰고, 재정을 잘 관리하여 쓸데없는 낭비를 줄일 것을 역설하였다.
그 뒤 병조참지·전라도관찰사·대사간·함경도관찰사·대사헌 등을 거쳐 1739년에는 진위겸사은부사(陳慰兼謝恩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740년 평안도관찰사, 다음 해 예조·이조판서, 우참찬이 되었고 1742년에는 사정당상(査正堂上)이 되어 훈신(勳臣)의 후손은 9대까지 군역을 면제할 것을 결정하였다.
1745년 호조판서 재임 중에 죽었다. 영조는 서종욱의 죽음을 애도하고 충후관대(忠厚寬大: 충성스럽고 후덕하면서 관대함)한 인물이라 평하고, 무신란을 예견한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1748년 문민(文敏)이라는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