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미국 국회의원단 일행이 한국을 통과한다는 소식을 접한 한국독립운동계는 이 기회에 한국민족이 일제에 저항하여 싸우는 모습을 이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우리 민족의 강렬한 독립의지를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광복군총영에서는 3개의 결사대를 편성하여 서울·평양·선천의 3방면으로 밀파하였다. 선천에 특파된 이학필(李學弼) 등은 당시 선천중학교 재학중인 박치의를 포섭하여 선천경찰서를 폭파하게 하였다.
이 해 9월 1일 새벽 3시 박치의는 이학필이 밖에서 망을 보는 사이에 경찰서로 들어가 폭탄 도화선에 불을 붙인 뒤 이를 투척하여 경찰서를 폭파하였다.
그리고 그 즉시 광복군총영에서 발행한 경고문과 격문을 뿌렸다. 9월 7일 일본경찰에 잡힌 박치의는 신의주지방법원·평양복심법원·경성고등법원에서 모두 사형이 언도되어 1921년 7월 2일평양형무소 교수대에서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