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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장식 장경호
토우장식 장경호
사회구조
개념
남녀의 구분 또는 육체적 결합행위를 일컫는 말을 가리키는 사회용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남녀의 구분 또는 육체적 결합행위를 일컫는 말을 가리키는 사회용어.
개설

생물학적 개념으로 성행위는 인간본능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며 자손을 번식시켜 사회의 기초인 가족을 이루게 한다.

사회적 개념으로 성생활은 노동에 따른 심신의 피로를 덜어 주고 휴식의 시간을 가지게 하는 생체리듬의 촉진제 구실을 한다. 또한 부부결합의 매개체 기능을 한다.

남녀의 성적 결합은 인간사회를 지속시키는 고리의 구실을 하며, 따라서 성욕은 식욕과 더불어 인간본능의 양대산맥의 하나이다.

성의 역사

인류출현의 초기단계에서는 남녀의 성행위가 생명체의 탄생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였다.

즉, 임신이나 출산 등이 성행위와 직접 관련되어 있는지를 모르고 임신자체를 식물의 영(靈)에 의하거나 바람이나 돌 또는 생령(生靈:산 사람의 영혼)이 여자의 몸에 들어가 잉태된다는 자연현상의 결과로 믿었다.

이러한 원시적 지식은 채집, 목축, 농경의 발전된 문화단계를 거치면서 가축사육법을 알게 되었고, 사육하는 가축들의 성행위를 관찰하면서부터 이를 자신들에게 비추어보면서 깨닫게 된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한반도에서 농경의 출현을 신석기 후기로 추정하는데, 이 시기의 중요한 사회적 변화로서 식량생산이라는 산업상의 변혁을 지적한다.

식량생산에 따라 필연적으로 인구가 증가하게 되며 나아가 증가된 인구에 대한 식량해결의 문제가 발생한다.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생산력의 확보, 일정영역의 고수 등 집단생활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며, 군집생활에서 오는 가족이라는 혈연의식이나 남녀의 성적 역할분담이 차차 싹트게 된다.

들판의 농경일은 불어난 인구의 일손을 요구하였고, 주거생활의 발달은 여성들로 하여금 자녀양육에 보내는 시간을 늘게 하였다. 그래서 남성들은 여성보다 활동공간이 넓어지고 역할이 증대되기 시작한다. 청동기시대는 청동기의 제작과 농경기술의 발달로 생산력이 확대된 시기이다.

백호(百戶)에 이르는 취락을 형성하면서 인구 증가로 인한 주거면적의 확대, 부부의 입주 등 가족이라는 개념이 좀더 구체화된다. 울주의 암각화(巖刻畵)는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림의 소재가 된 120여 점의 동물상을 비롯하여 고래잡이, 사냥 등의 수렵화 및 인물상 등 모두 150여 점에 달하는 방대한 양을 싣고 있다.

이로 미루어 그들의 가장 큰 관심사가 식량획득에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수렵화나 동물화에 그려진 대상들이 그들의 주된 재원이었음을 나타내준다.

특히, 인물상에 남성의 성기를 드러낸 그림은 성적인 특징과 직결되며, 이는 남성성기의 신비력에 착안한 생산과 번식의 상징적 의미로 해석된다. 이러한 사실을 더욱 뒷받침하게 하는 것은 성기를 드러낸 남성이 밭갈이하는 문양을 청동유물에 새겼다는 점이다.

역사시대로 접어들면 고대 건국신화나 설화 속에 출생과 관련된 주제로 단군(檀君), 주몽(朱蒙), 혁거세(赫居世) 등의 이야기들이 전한다. 이들 신화나 설화내용을 근친상간과 관련된 성윤리적 측면으로 해석한 학자도 있다.

성과 직접 관련된 내용으로는 『삼국유사』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조에 여근곡(女根谷), 즉 여성성기에 얽힌 기사가 전한다.

백제군사 500명이 여성의 성기형국을 하고 있는 여근곡에 숨어 있다가 모두 죽게 되는데, 이는 남근의 상징적 표현인 개구리, 즉 백제군사가 여근인 옥문지(玉門池) 또는 여근곡에 들어오면 죽게 된다는 여성성기에 얽힌 설화적 내용이다.

또 『삼국유사』 지철로왕(智哲老王)조에는 배필을 구할 때 음경의 크기가 선택기준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백제 무왕 즉위 초에 사비남해(泗沘南海)에 떠오른 여자의 시체가 신장이 73척, 족장(足長)이 6척, 음장(陰長)이 6척이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한편, 삼한시대 신성구역으로 알려진 소도(蘇塗)를 수터, 즉 남성의 터로 보고 거기에 세운 나무장대[立大木]를 목재남근의 상징물로 해석한 견해도 있다.

발굴한 유적유물 중에 신라의 토우상(土偶像)은 성기숭배사상을 가장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무덤의 부장품으로 사용된 이들 성과 관련된 토우들은 크게 애정이 넘치는 부부상, 성기를 노출한 남녀상, 성교합의 성애상(性愛像)으로 나눌 수 있다.

경주 노동리에서 출토된 항아리 장식으로 남근이 신체의 전체적 균형에 비하여 과장되게 표현된, 노젓는 뱃사공의 토우상이나, 미추왕릉지에서 출토된 토우 가운데 남자보다 여자 쪽을 크게 만든 토우상, 그리고 남녀가 성교합 중에 있거나 남근을 곤두세워 여인의 음부에 맞대고 있는 형상들에서 당시의 성기신앙을 엿보게 한다.

이들 토우 모두가 무덤의 부장용으로 사용된 점은 생산력에 근거한 성기숭배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며, 또는 사자(死者)의 저승세계에서의 부활과 자손들의 번창을 기원하는 간절한 소망을 담은 의례적 행위의 하나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견해이다.

1976년 경주 안압지 발굴조사에서 송목재(松木材) 모조남근이 발견되어 삼국시대 이래 통일신라시대의 성문화를 밝혀주는 자료가 되었는데, 이와 비슷한 예가 일본의 나라시대(奈良時代) 헤이조궁(平城宮) 우물에서 발견되어 이 시대 문화의 교류까지도 짐작하게 하였다.

고대가요에서도 성의 상징적 묘사를 엿볼 수 있다. 남녀간의 사랑과 이별을 담은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황조가(黃鳥歌)」, 성의 향연을 노래한 「구지가(龜旨歌)」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특히 「구지가」는 남성성기를 거북의 머리에 비유하여 구애(求愛)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밖에 수로부인(水路夫人), 처용설화(處容說話) 및 서동(薯童)과 선화공주(善花公主) 이야기 등에서 남녀의 애정관을 그리고 있다.

고려시대의 성관계 자료는 매우 빈약한 형편이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10여 편의 고려속요 속에 암시적으로 성을 노래한 작품들이 있다. 「쌍화점(雙花店)」, 「이상곡(履霜曲)」, 「만전춘(滿殿春)」 등이 그것인데, 이들 속요는 성적 욕구를 노래가사 속에 담아 간접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학자들은 고려인들의 애정세계에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이 균형을 잃어가는, 변태적 현상들이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성교합을 부각(浮刻)한 동경문(銅鏡紋)이 이 시대 유물의 유일한 자료이다. 그러나 이 또한 출토지가 분명하지 않아 문양이 뜻하는 바를 자세히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조선시대에 접어들면 국가의 기틀을 세우기 위한 방편으로 정치적 이념을 유교적 가치관에 두고 도덕적 질서유지를 중시한 까닭에 엄격한 신분질서가 형성된다. 성윤리 또한 강한 제약 속에서 경직된 면을 보인다.

『경국대전』 형전(刑典)에 10악(十惡)의 죄목이 주목을 끈다. 그 가운데 소공(小功) 이상의 친(親)이나 부조(父祖)의 첩을 간통(姦通) · 상간(相姦)하면 내란죄(內亂罪)로 적용하고 있다. 이는 곧 관습처럼 지속되었던 성윤리의 사회적 폐습을 바로잡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된다.

조선시대 문헌기록에서도 성과 관련된 몇몇 사례들이 보인다. 농경문화(農耕文化)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사직신(社稷神) 숭배가 조선시대에도 각 지방에서 행하여져왔다.

사직신을 위한 연중제사 의례시에 신물(神物)로 목제남근을 깎아 붉은 칠을 하고, 푸른 글씨를 써서 봉납하였다는 부근(付根) 풍습에 대하여 세종조의 황희(黃喜), 맹사성(孟思誠), 허조(許稠) 등의 사직신 유래를 더듬는 대화내용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부근이라는 명칭은 부군(付君, 府君), 부군당(府君堂)으로 달리 기록되어 있으나 남성성기인 남근과 같은 것으로 파악된다. 부근에 대한 기록은 『중종실록』에서도 볼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나라 각사(各司) 안에 모두 신을 설치하여 제사하는 풍습이 있는데 부근이라 한다. 행해온 지 이미 오래이므로 능히 혁파하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이 때에 이르러 헌부(憲府)가 먼저 지전(紙錢)을 불사르고 각사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모두 불사르게 하여 그 제사를 금하니, ‘쾌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또 양현고(養賢庫) 안에 부근의 제사를 지낸 일이 있는데, 대비(大妃)가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양현고의 부근신에 양근신물(陽根神物)을 바쳤다.”는 내용이다.

위의 기사는 민간에서뿐만 아니라 국가와 궁중에서도 신앙되었다는 부군당과 관련하여 목제남근을 당사(堂舍) 안에 걸었다는 사실이,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 『조선의 무격(巫覡)』(1932, 조선총독부) 등에도 언급되어 부근숭배, 즉 남성성기 숭배신앙이 과거부터 줄곧 계속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한편, 종교적 관행으로 속리산 법주사에서는 ‘송이(松耳)놀이’라 하여 매년 설날에 신자들이 목제남근을 깎아 산정신당에 봉납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송이란 남근을 이르는 불교적인 은어라 하며, 『동국여지승람』 보은현사묘조(報恩縣祠廟條)에는 “대자재천왕사(大自在天王祠)는 속리산정에 있는데, 그 신은 매년 10월 인일(寅日)에 법주사로 내려온다.

산중 사람들이 신을 즐겁게 맞이하기 위하여 신사(神祠)를 지으니 45일 동안 머물다 돌아간다.”라는 기사가 있어 그러한 풍습을 짐작하게 한다.

조선시대의 유교적인 가치관 속에서 남녀의 성속(性俗)이나 성애는 노출보다는 숨겨지는 속성으로 더욱 변모해간다. 조선 후기 양반사회에서 유행하였던 춘화(春畵)는 당시의 성속을 대변해주고 있다.

춘화의 배경은 은밀한 방안이 아닌 자연공간이나 기방(妓房) 또는 생활주변 어느 곳이나 대상이 되고, 성교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승려와 유부녀, 머슴과 주인집 하녀, 주인과 여종 등 정상적인 신분관계가 아니며, 혼교(混交)의 장면까지도 보인다.

이러한 춘화의 수요층이 하층민보다는 오히려 상층사회에서 유행하였고, 신분계층을 초월한 성의 무질서는 상층민들에 대한 하층민들의 성적인 보복에서 맞는 쾌감 또는 반항의식이나 평등의식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조선 후기 문학작품 속에서도 민중들의 성관념을 읽을 수 있다.

판소리계 소설인 『변강쇠가』에 대하여 성기묘사나 여주인공 옹녀와 변강쇠 사이에서 벌어지는 성행위의 표현이 노골적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당시 생활고와 윤리고에 찌들린 민중들의 원색적인 삶을 가식 없이 승화시켰다는 지적도 있다.

이 무렵 유행하였던 사설시조(辭說時調)나 판소리계통에서 남녀의 성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많은 것은 범람하는 성문화의 흐름으로 이해되고 있으니, 성을 소재로 삼은 사설시조만도 60수가 넘는다고 한다.

민속에서의 성 표현

남녀의 성을 표현하거나 성기를 상징적으로 묘사한 민간의 풍습은 매우 다양하다. 민속으로 나타난 성은 신성한 숭배의 대상으로 신앙시되는 것과, 해서는 안 될 금기로서의 양면성을 아울러 지니고 있다.

성을 남녀로 구분할 때 남성보다는 여성에 더 많은 제약과 금기항을 두고 있다. 예컨대, 동제(洞祭:부락의 수호신에게 무병 · 평온무사 · 풍년을 빌던 제사)에서 여자의 임신이나 출산, 월경 등을 부정과 불길한 징조로 보았다.

이에 대한 금기사항을 어겼을 경우 직접 제례를 맡았던 제관 자신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가 화를 입거나 재앙이 닥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민속에서의 성적인 표현은 간접적인 상징성, 직접숭배 그리고 주술적인 의미를 띤 성기신앙으로 나눌 수 있다. 줄다리기에서의 암줄과 수줄의 결합이나 가면극에서의 성행위는 사회풍자적인 상징성이 있다.

또한 실제의 성기를 모조하였거나 비슷한 암석 · 선돌 · 양석류(陽石類)에 대한 성기암신앙, 그리고 당제의 신물(神物)로 봉납(捧納:물건을 받쳐 올림)되는 성기신앙 등이 있으며, 이 밖에 자연지형에 성적 의미를 결부시킨 풍수도참사상을 예로 들 수 있다.

우리 나라 남부지방에 많은 분포를 보이는 줄다리기는 비교적 큰 행사로 꼽힌다. 마을을 남녀 또는 동서남북의 어느 양편으로 나누어 행하는 마을 단위의 소규모 행사 외에 크게는 면 · 군 단위의 대규모 행사도 있다.

대개 남녀로 편을 나누며, 승부 결과 여자 쪽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것은 통념처럼 되어 있다. 암줄과 수줄을 따로 만들어 두 줄이 결합해야 경기가 시작되는데, 암줄의 고리 속에 수줄을 끼우고 비녀목을 끼우는 결합과정이 남녀의 성교합을 상징화한 것이다.

여자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관념은 고대로부터 여성이 지닌 다산풍요의 속성을 반영하고 있다. 민속극에 표현된 성적 묘사는 더욱 개방되어 있다.

「동래야류」와 「오광대놀이」에 등장하는 말뚝이는 하인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주인양반의 부인과 사통하여 양반의 체면을 손상시킨다.

또 「양주별산대놀이」와 「봉산탈춤」 등에 나오는 노승과 소무, 취발이와 소무, 취발이와 양반부인과의 무질서한 성행위는 지배계층의 성적인 횡포나 독점에 대한 피지배계층의 불만과 갈등을 성행위로 보복한 시대정신을 반영한 반항의식으로 보고 있다.

생식기에 대한 민간지식의 뿌리는 고대의 생산과 다산풍요에 관계된 믿음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자연적이든 인위적이든 성기의 형태를 한 물체가 신앙의 대상이 될 경우, 대개는 기자(祈子) · 마을 액막이 · 풍수비보(風水裨補)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즉, 성기와 유사형태의 암석을 성신(性神)의 신체(神體)로 상정하여 그 곳에 치성을 드리거나 기원하면 임신을 하게 된다는 주술적 의미로서의 성기숭배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신앙되는 형태는 자연암석을 세우거나 모조성기를 세우고 자식 없는 부녀자들이 남의 눈을 피하여 치성을 드리는 기자신앙, 동제시에 신물로 봉납되는 모형성기, 여음부(女陰部)의 형상을 한 암혈(巖穴)에 얽힌 전설 등으로 나누어진다.

1984년에 나온 『한국의 성신앙 현지조사』에 의하면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와 전라남도 130개소의 성기암석자료가 조사되었다. 남성관련 유적이 37개소, 여성 쪽이 28개소, 남녀가 병존하는 혼합형이 8개소, 기타 57개소로 나타났다.

같은 책의 「전국 성신앙유적 문화내용표」에는 비록 정밀조사는 아닐지라도 총 45개 유적 가운데 남성성기 12개소, 여성성기 8개소, 짚성기 1개소, 동물생식기 2개소, 자연석 22개소로 분류되었다.

이들 성기유적 중의 57%인 26개소가 자식을 바라는 기자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며, 5개소가 여자들의 바람기 유발과 관련되어 있었다. 또한 그 밖의 것들은 마을수호 · 풍년풍어 · 가정위안 · 식수원(食水源)의 의미를 띠고 있다.

성기암숭배의 현지유형은 남근의 형태를 한 양석류, 마을경계표 · 금표, 동제신의 기능을 가지는 남성기 의미의 선돌, 성기형태의 자연암석이나 암혈, 인위적으로 남근을 조성하여 치성의 대상이 된 기자석 등으로 대별할 수 있다.

또한 자손번성의 의미로 세웠다는 묘전석주(墓前石柱) 등이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온양민속박물관의 기자석, 전북특별자치도 순창군 팔덕면 산동리와 창덕리의 석조모형 남근석, 정읍군 원백암리의 당산석 등이 있다.

여성기숭배신앙은 남성과 달리 자연적으로 형성된 지형이나 암석, 암혈 등에 대한 민간 신앙을 말한다. 『삼국유사』의 설화에 등장하는 여성국부형 계곡[女根谷]과 샘[玉門池]의 형태를 비롯하여, 여성성기숭배신앙은 각 지방마다 남성성기전설만큼이나 많다.

신앙되는 유형은 자식을 얻는다는 기자신앙, 관심부족이나 부주의로 인한 마을 여성들의 바람기 유발로 나눌 수 있다. 그 형태는 여성의 하체를 닮은 암석, 암혈, 지형, 샘 등이다. 그리고 풍수지리의 명당터도 여성의 국부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구체적인 사례를 보면 여근암의 구멍에 나무를 꽂았을 때 꼭맞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라남도 나주시 산포면 산제리의 속칭 아들바위, 돌을 던져 얹히거나 맞히면 아들을 얻는다는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삼일리의 눈썹바위로 불리는 여근암, 강원도해금강의 음부를 닮은 암혈 속에 자식을 바라는 부녀자들이 남성성기형의 돌을 싸서 바쳤다는 내용의 전설 등이 전한다.

이와는 반대로 잘못 관리하거나 건드렸을 때 마을 처녀나 부녀자들이 바람난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구대리 마을 안산 숲속의 여근암, 화순군 춘양면 우봉리 여근암, 전북특별자치도 남원군 주천면 호경리 내춘마을 성욕바위, 울릉도 모시게의 토끼바위에 뚫어진 처녀굴, 서울 중계동 밑바위 등으로 각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게 구전되고 있다.

당제의 신물(神物)로 남성의 모조성기가 봉납되는 사례는 앞서 말한 부근과 부군당의 문헌기록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신남리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 자정을 기하여 해랑제(海娘祭)를 거행하는데 제신(祭神)은 익사한 처녀신이다.

처녀는 자신의 청춘한을 풀기 위하여, 제신으로 모시고 남근을 바치면 그 대가로 해난사고를 없게 해주고 풍어를 약속하였다고 한다. 이에 마을사람들은 매년 제사 때마다 남근을 깎아 바쳤다.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 동리의 해랑당(海娘堂) 이야기가 있다. 이곳에서도 제신으로 모신, 익사한 기생의 한을 풀어주기 위하여 목제남근을 바친다고 한다.

한편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천촌리의 갯제와 용왕제, 그리고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위도면 위도리의 띠뱃놀이에서 바다 멀리 띄워 보내는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는 남근을 드러낸 채 희생공물로서 조업의 안전과 풍어를 바라는 뜻으로 받친다.

이상을 종합해볼 때 우리의 전승민속의 현장에 나타난 성의 의미는 개인이나 집단생활의 안녕을 염원하는 신앙적 · 종교적 욕구충족의 기능을 가지는 성스러운 것이었고, 한편으로는 해서는 안 될 경계나 금기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신라의 토우』(이난영,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6)
『한국의 성(性)신앙 현지조사』(이종철 외, 국립광주박물관, 1984)
「조선어남녀근명칭어원고」(최남선, 『괴기』 2, 1929. 12.)
「성기신앙연구」(김태곤, 『한국종교』 1, 원광대학교, 1971)
「민속에 있어서 성(性)의 의미」(김명자, 『정신건강연구』 3, 한양대학교,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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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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