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정(三政:田政·軍政·還穀)의 교혁(矯革)을 주장하고 봉기한 농민군은 1차봉기 때는 수만 명이 읍내에 난입하여 관리의 가옥을 파괴한 것이 32호, 재산을 분탕한 것이 30여 호에 이르렀으며, 2차봉기 때는 읍외의 명암(明巖)장터에 모여 지탄받던 민가를 훼손한 것이 8호, 재산을 분탕한 것이 많은 호수에 달하였다.
조정에서는 경상도관찰사 이돈영(李敦榮)에게 민란의 수습을 맡겼으나, 1차봉기 이후 농민 500∼600명은 성밖에서 향회(鄕會)를 열고 환폐(還弊)·결폐(結弊)·군폐(軍弊) 등의 교혁을 요구하지 않는 날이 없다가, 5월 13일 선무사(宣撫使) 이삼현(李參鉉)의 효유로 겨우 진정되었다.
그 뒤에 농민 80∼90명이 관아로 몰려와 모두 자기가 죄인임을 자청하므로 효유하여 돌려보냈으며, 수창자(首倡者)나 처형상황은 알 수 없다. → 임술민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