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사고는 조선 전기에 실록과 같은, 국가 중요 사적을 보관 · 관리하던 외사고의 하나이다. 이 사고는 1439년(세종 21) 7월 춘추관이 올린 외사고 확충 계획에 따라 설치되었으며, 춘추관 내사고와 함께 외사고인 충주 · 전주 · 성주의 사고가 정비되어 4사고 체계가 성립되었다. 성주사고는 1538년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가 다시 복구되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보관하고 있던 실록과 함께 파괴 · 소실되었다. 전란 이후 외사고가 산간의 오지나 도서 지역으로 이설됨에 따라 성주사고를 비롯한 조선 전기의 사고는 모두 복구되지 못하였다.
성주사고는 조선 전기에 실록(實錄)을 비롯한 국가의 주요한 역사 기록물을 보관 · 관리하던 외사고(外史庫)의 하나이다. 성주에 외사고가 설치된 것은 1439년(세종 21)의 일이었다. 이해 6월 사헌부가 상소한 사적(史籍) 분장지책(分藏之策)의 건의에 따라, 한 달 뒤인 7월 춘추관에서 성주와 전주에 사고를 설치할 것을 청해 승인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춘추관의 내사고(內史庫)와 충주의 외사고 두 곳에서 실록 같은, 국가의 중요 기록을 나누어 보관하였으나, 이때 성주와 전주에 사고가 증설됨에 따라 4사고 체계가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내사고와 외사고를 병설하여 운영하였던 까닭은 귀중한 사적은 분장(分藏)한다는 원칙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성주사고에 실록이 보관된 것은 6년이 지난 1445년 12월 예빈시소윤(禮賓寺少尹) 김길통(金吉通)에게 태조 ‧ 정종 ‧ 태종의 실록을 봉안하게 하면서부터였다. 설치 당시 실록각(實錄閣)은 관아(官衙)에 인접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사고 건물을 관아 인근에 두었던 것은 임진왜란 이전에는 외사고 입지 선정에 있어 사적의 이용과 관리의 효율성을 중요시한 까닭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 때문에 화재의 위험이 커 1466년(세조 12) 대사헌 양성지(梁誠之)가 성주사고를 선산의 금오산으로 옮길 뿐 아니라 각 외사고를 산간의 오지로 이건하는 방안을 건의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양성지의 우려는 훗날 현실이 되어, 1538년(중종 33) 11월 6일 성주사고가 화재로 불타 버렸다.
불타 버린 실록의 인출(印出) 및 정서(正書) 작업은 화재가 있은지 일년 반쯤 지난 1540년 4월에 완료되었으며, 좌찬성 소세양(蘇世讓)에게 실록을 다시 봉안하게 하였다. 그런데 실록각은 화재 사건 이후 언제 재건되었는지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다.
다만 재건된 사고의 건물을 2층으로 지었는데, 아래층이 넓게 트였고 2층 건물은 높이 솟아 사다리를 통해 올라갈 수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후기의 다른 외사고 건물들과 비슷한 중층(重層) 누각(樓閣) 형태의 기와집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복구된 사고 건물과 실록들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병화를 피하지 못하였다. 당시 실록이 든 사궤(史櫃)들을 땅에 파묻었으나 모두 발각되어 잿더미로 변하고, 사각(史閣) 건물은 그 뒤 세 차례의 성주 전투 때 불타 버린 것으로 보인다.
전란이 마무리된 후 병화를 피한 전주사고본 실록을 저본으로 실록 3부를 새롭게 제작하였으며, 이를 전주사고본 원본 및 교정쇄본과 함께 춘추관 · 강화부 · 묘향산 · 태백산 · 오대산에 분산하여 보관하였다.
이처럼 조선 전기의 4사고 체제는 임진왜란 이후 5사고 체제로 새롭게 변화되었으며, 외사고 입지 선정에 있어 사적의 이용과 관리의 효율성을 중요시하였던 입장 또한 사적의 안전을 최우선시하는 방향으로 전환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