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판은 모두 1,100매이다.
이익의 유고는 이익이 1763년(영조 39년) 타계한 직후 조카이자 문인인 이병휴가 중심이 되어 충청도 예산에서 성호문인들의 협조아래 정리되기 시작하여 영조 50년(1774)『성호선생문집』 70권이 나왔다. 그 뒤 1820년대 이익의 증손 이재남(李載南)과 안정복 문인 황덕길(黃德吉)이 다시 분류 정리하다가 완성치 못하였고, 1890년 무렵허전(許傳)문인 수당(修堂)이남규(李南珪)와 이명익(李明翊) 등 충청지역 사림들 90여명이 참여하여 대대적인 편교가 이루어진 결과 본문 50권으로 재편되었으나 간행은 추진하지 못하였다.
『성호문집』 간행논의는 1885년 무렵 안희원(安禧遠) · 유인목(柳仁睦) 등이 서울에서 시도한 일이 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진척이 없었고, 1891년 가을 충청지역 성호학통 사림들이 간행을 추진하였으나 역시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그 후 1903년 성재(性齋)허전(許傳)의 문집이 경상도 산청 법물리에서 거의 완성될 즈음, 허훈(許薰) · 노상직(盧相稷) · 이병희(李炳熹) · 조병규(趙昺奎) 등 허전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간행하기로 결의하였으나 역시 경비조달 등 문제로 추진이 늦어지다가, 1917년에 허전 문인 노상직(盧相稷) · 이병희(李炳憙) · 이병규(李炳圭) 등이 주관하여 1917년 경상남도 밀양(密陽) 퇴로리(退老里) 서고정사(西皐精舍)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이 판목은 1922년 허전의 제자인 안희원(安禧遠)에 의해 광주 안씨 문중의 재사(齋舍)인 모렴당(慕濂堂)에서 판각한 것이다. 즉 밀양 천연정에서 1917년에『성호선생문집』27책본을 간행한 후, 1922년에 다시 전집 36책으로 간행된 것이다. 그러나 안희원은 완간을 보지 못하고 타계하고 그 자제들이 계승하여 1922년에 완간하였는데, 이것이 세칭 36책본 또는 사포본(沙浦本)이라고 부른다. 퇴로 간행의 27책 본은 『성호선생문집』, 이 36책 본은 『성호선생전집』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문집 간행의 진행과정과 출연자의 이름과 금액이 기록된 『모현록(慕賢錄)』이 전한다.
현재 이 판목은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전사포리 안연수가 소장하고 있고, 1979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성호 선생의 문집은 여러 차례의 시도 끝에 순탄치 않은 과정을 거쳐 간행되었다. 특히 『모현록』에 출연자의 이름, 경비 내역 등을 자세하게 살필 수 있어서, 문집간행의 정황을 살필 수 있다. 따라서 이 판목은 성호학통을 이으려는 후학들의 자부심과 긍지의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성호이익의 학문과 사상을 이해하는데 기본이 되는 사료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