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이병규의 증손자 이덕원(李德遠)이 6·25 때 소실된 유고를 모아 편집·간행하였다. 권두에 송재직(宋在直)의 서문, 권말에 박효수(朴孝秀)와 이덕원의 발문이 있다.
3권 1책. 석인본. 전남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권1에 시 100수, 소(疏) 6편, 헌의(獻議) 2편, 서(書) 12편, 권2에 잡저로 계갑일기(癸甲日記), 통문(通文) 3편, 정(呈) 3편, 논(論)·서(序)·기(記)·발(跋) 각 1편, 제문 6편, 행장 1편, 권3에 가장(家狀)·묘지명·묘갈명·만장(挽章) 등이 수록되어 있다.
「구폐의(捄弊議)」는 당시 관찰사나 수령들이 탐학무도를 자행해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 동학도나 도둑이 되게 만든 악폐를 지적하고, 그 개혁을 요구한 것이다.
첫째, 양병족재(養兵足財)의 방법으로 봉세관(捧稅官)·마름[舍音]·선격(船格) 등 관리의 지방 파견을 금지시키고, 둔목역토(屯牧驛土)를 매각 처분해 도성 주위 백리 내외의 땅을 사서 둔전법(屯田法)으로 양병(養兵)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은행 예금의 이자로 양병하는 방법, 각 고을의 수령이 책임지고 관리하고, 일정한 세금을 바친 것으로 양병할 수 있는 방법도 제시하였다.
둘째, 인삼 정책에 있어서 갑오경장 이후 사역(司譯)들이 담당하던 인삼 교역을 금지시킴으로써 많은 통역원의 불만을 사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 해결책으로 30명을 한정하고, 종전처럼 무역을 하게 한다면 불만을 해소시키고 아울러 세수 증대, 국가 비용 절감의 효과도 기대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계갑일기」는 1893년 9월 28일부터 1894년 9월 8일까지의 만동묘(萬東廟) 복원을 위한 상소 과정을 적은 일기문이다. 당시 만동묘 복원에 대한 조정의 분위기, 재야 사림의 처지, 상소를 중심으로 한 사림과 유생들간의 관계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