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성주 출신.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제1차세계대전 이후의 세계평화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강화회의가 개최되자 김창숙(金昌淑)·곽종석(郭鍾錫)·김복한(金福漢) 등 유림계 지도자 137명이 독립청원서를 작성, 강화회의에 제출하였는데 이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3·1운동이 발발하자 4월 2일 성주에서 군민 500여 명을 동원하여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징역 1년6월을 선고받았다. 1923년 출옥한 뒤 고향에서 송인집(宋寅輯)과 사립 동창학원(東昌學園)을 설립하여 육영사업을 하였다.
광복 이후인 1948년 공산당에 협조하지 않는다 하여 공산당원의 습격을 받아 피살당하였다.
1963년 반공활동의 공을 인정받아 내각수반의 표창장이, 그리고 1980년에는 독립운동을 전개한 공로로 대통령표창,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