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극인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예조참의, 선산부사, 부평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신백(愼伯)
정곡(靜谷)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73년(선조 6)
사망 연도
1635년(인조 13)
본관
여산(廬山: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
주요 관직
예조참의|선산부사|부평부사
관련 사건
정묘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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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예조참의, 선산부사, 부평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여산(廬山). 자는 신백(愼伯), 호는 정곡(靜谷). 송유(宋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송세지(宋世智)이고, 아버지는 감찰 송초(宋礎)이며, 어머니는 윤확(尹確)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02년(선조 35)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임되었다. 이후 예문관검열·봉교·대교·형조정랑을 거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으로 『선조실록(宣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 사헌부집의·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하면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미워하는 광해군에게 김제남(金悌男)을 비롯한 서인(西人)·남인(南人) 계통의 사람들을 탄핵하는 데 관여하였다.

그 뒤 사간으로 폐모론에 가담하고, 남이공(南以恭)·이원익(李元翼) 등을 탄핵하는 데에도 참여하였다. 인조 때 중화부사(中和府使)가 되었다가 정묘호란이 일어나 후금(後金)의 군대가 침입할 때 감사에게 알리지 않고 도망쳤으므로 삭탈관작되기도 하였다.

1628년(인조 6)에는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가도록 되었으나, 마침 모문룡(毛文龍)이 사신일행을 도중에서 기다리다가 은과 인삼을 빼앗으므로 되돌아왔다. 다음 해에 동지 겸 성절사(冬至兼聖節使)로서 명나라에 다녀 가서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왔다.

그러나 사헌부로부터 국가의 체모를 손상하고 경솔하게 행한 과실이 많다는 명목으로 탄핵을 받았다. 그 뒤 예조참의·선산부사·판결사(判決事) 등을 역임하고, 1635년 부평부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용주유고(龍洲遺稿)』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방목(國朝榜目)』
『대동야승(大東野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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