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산면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26일에 사강리에서 홍면(洪면)의 지휘 아래 약 100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를 부름으로써 시작되었는데, 그 전개과정은 매우 평화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틀 뒤 장날인 3월 28일에는 5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이 때 시위군중은 일본경찰과 충돌하게 되었다. 일본경찰은 홍면 외 2, 3명을 주재소로 끌고 가려고 시위군중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홍면을 향하여 권총을 쏘았다.
홍면이 그 자리에서 쓰러지자 이 광경을 본 군중은 일시에 격노하여 일본경찰에게 달려들었다. 위급함을 느낀 일본경찰은 자전거를 타고 사강리주재소로 달아났으나 흥분한 군중은 돌과 몽둥이를 가지고 쫓아가 결국 순사부장 노구치(野口)를 죽이는 사태로 발전하였다.
이같은 송산면민들의 완강한 항거에 부닥친 일본헌병과 경찰은 4월 12일 대대적인 보복행위를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날 송산면에는 헌병 5명, 군인 7명을 선두로 무장한 순사 및 순사보 수명이 나타나 닥치는 대로 체포, 구금하고 민가에 방화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헌병과 경찰은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방화하였는데, 사강리를 비롯하여 봉가(鳳歌)·삼존(三尊)·육일(六一)·마산(馬山)·중송(中松) 등 6개 마을, 총 525호 중에서 200호를 소각하였다. 그 중 사강리에서는 131호 중 82호가 불타고 봉가리에서는 57호 중 47호가 불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