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안음의 8대손 안규호(安圭灝)·안규용(安圭容) 등이 편집·간행하였다. 원래 증손 안창겸(安昌謙)에 의해 3책으로 편집되었으나 수화에 분실되어 1책으로 간행하였다. 1999년에 국역본이 출간되었고, 2012년에는 『(증보국역) 송촌집』이 간행되었다.
3권 1책. 목활자본. 국립중앙도서관과 전남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권1에 시 21수, 소(疏) 5편, 서(書) 13편, 기(記) 1편, 제문 8편, 권2·3에 부록으로 연보·만사·제문·신미신원소(辛未伸寃疏)·계유신복소(癸酉伸復疏)·을유청작소(乙酉請爵疏)·건사우통문(建祠宇通文), 민진후(閔鎭厚)가 찬한 행장, 송명흠(宋明欽)이 찬한 묘표, 이종문(李鐘文)이 찬한 묘갈명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묘표는 산일(散逸)되었다.
소에는 효종의 장례 때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었는데 노론인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의 주장대로 1년으로 결정되자 3년을 주장하였던 남인 윤선도(尹善道)에게 죄를 주자는 내용의 「청선도가율소(請善道加律疏)」 2편, 그 뒤 남인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자 송시열·송준길을 변호한 「진변소(陳辨疏)」 1편 등이 있다.
서는 송준길·송시열 이외에 당시 거유였던 민정중(閔鼎重)·김수항(金壽恒) 등 여러 사람과 내왕한 것으로 학문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제문도 8편 중 5편은 산일되고 3편만이 실려 있다.
「신미신원소」는 1689년(숙종 15) 송시열이 왕세자 책봉 문제로 숙종에게 노여움을 사 제주로 귀양가게 되자 저자도 훈작(勳爵)을 추탈당했는데, 그 뒤 1691년에 이광석(李光錫)이 유생 100여 명과 함께 저자의 신원을 청하는 상소문이다. 「계유신복소」는 박사 김유(金楺)가 관학(館學) 유생을 거느리고 복훈(復勳)을 청하는 내용의 소이다.
「을유청작소」는 1705년 호남 유생 유수정(柳壽鼎) 등 100여 명이 저자에게 증작해 줄 것을 청하는 상소문이다. 「건사우통문」에는 1862년(철종 13)에 이지용(李志容)·박중홍(朴重洪) 등 10인이 발의하여 1866년 사우건립을 시작하다가 바로 그만두었다는 기록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