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31본산이 지정된 후에는 유점사(楡岾寺)의 말사였다. 신라 법흥왕 때 보운조사(普雲祖師)를 따르던 신도 혜각(惠覺)이 창건하였다고 하며, 일설에도 그 연대가 520년(법흥왕 7)이라고 전한다.
그 뒤 974년(광종 25)에 박빈거사(朴彬居士)가 이 절을 중창하고 수태사라 하였으며, 1674년(현종 15)에는 선방(禪房)을 별지(別地)에 이건하였다.
1695년(숙종 21) 윤제민(尹濟民)이 지은 사적비명(事蹟碑銘)에 의하면, 당시 이 절은 법전(法殿)·선승당(禪僧堂)·좌우상실(左右上室)·남암(南庵)·길상전(吉祥殿) 등의 오래된 당우들을 비롯하여 수년 사이에 회언(懷彦)과 도안(道安)의 노력으로 신축한 종각(鐘閣)·동서별실(東西別室)·시왕신전(十王神殿)·만세루(萬歲樓) 등의 당우들이 있었고, 명진당(冥眞堂)·퇴휴당(退休堂) 등 6명의 고승들의 유골을 모신 부도(浮屠)가 있었다 한다.
그 뒤 1834년(순조 34)에 선방을 옛터로 다시 이전하였고, 1894년에는 정암(定庵)이 중수하였으며, 1928년에는 주지 김정완(金正完)이 중수하였다. 그러나 6·25의 격전으로 인하여 이 절은 완전히 폐허화되어 현재 그 유지조차 찾아보기 힘든 상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