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1년(원종 12) 1월 개성의 관노 숭겸과 공덕(功德) 등이 그 무리를 모아 몽고의 다루가치(達魯花赤)와 고려의 관리들을 죽이고 진도의 삼별초에 합세하려다가 대정(隊正) 송사균(宋思均)의 고발로 발각되어 잡혀 죽었다.
이 관노 숭겸 등의 모반사건은 몽고에 대한 적개심과 자신들의 신분해방에 원인이 있었다고 하겠으나, 이 사건이 일어나던 해는 몽고의 강압으로 개성환도가 실현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고, 또 진도를 근거지로 삼별초가 기세를 떨치고 있던 시기였다.
이 사건은 주위에 큰 영향을 미쳤으니, 고려사람이면서 원나라 장수인 홍다구(洪茶丘)는 숭겸 등을 잡아 심문하면서 이들을 고려정부에 연루시켜 그것으로 개성을 쳐서 빼앗으려고까지 꾀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상장군 정자여(鄭子璵)를 몽고에 보내어 이 사건을 고하고, 이 사건을 고발한 송사균에게 은병(銀甁)과 나견(羅絹)을 하사하며 그 관직을 섭별장(攝別將)으로 승진시켰다.
그리고 대부도(大部島 : 지금의 경기도 남양 大阜島)사람들이 개성에서 숭겸의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자극을 받아 몽고병 6인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당시 대부도에는 몽고병이 들어와 백성들을 약탈하므로 고통이 심하고 원망이 컸다.
이것은 당시 민심의 향방을 잘 알 수 있는 사건으로, 삼별초가 피지배인인 백성들의 호응을 많이 받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