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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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동안의 시간의 변화를 측정하거나 시각을 알려주는 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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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하루 동안의 시간의 변화를 측정하거나 시각을 알려주는 기구.
내용

역사시대에 들어가기 훨씬 전부터 인류는 세계 어디서나 시간을 의식하고 그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재고 있었다. 하루 동안의 시간의 변화를 재는 장치가 시계였다면, 한 해 또는 그 이상 긴 동안의 시간을 재는 장치는 역(曆, calendar)이었다.

하루 동안의 시간변화를 객관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예로부터 해의 움직임을 이용하는 해시계가 기준이었다. 그러나 해가 없는 밤이나 흐린 날에는 물의 흐름을 이용한 물시계가 간편한 시계가 되었다. 해시계와 물시계 이외에도 시간의 변화를 일정하게 나타내 주는 것이면 무엇이나 시계노릇을 할 수 있었다.

물시계와 같은 이치로 모래를 넣어 흘려주어 모래시계를 만들 수도 있었고, 향이나 초를 태워 그것이 타들어가는 속도를 보아 시간을 재는 수도 있었다. 또한, 달이나 별의 운동도 시계로 이용될 수 있었다. 이런 모든 시계를 ‘자연시계’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기계장치에 대한 기술이 발달하면서 인류는 차차 기계시계에 눈뜨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시계의 대부분은 기계시계에 속한다. 우리 역사에서는 15세기의 자격루 등이 상당히 복잡한 기계장치를 활용한 물시계였으나, 본격적인 기계시계로의 이행은 17세기 서양식 시계의 영향을 받은 뒤에 일어났다.

(1)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

우리 나라에서 어떤 자연시계가 제일 먼저 발달하기 시작하였고 언제 그것이 어떤 수준으로 발달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예를 들면 ≪삼국사기≫에는 물시계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은 있지만 해시계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그러나 신라 때의 해시계 파편으로 보이는 유물 하나가 경주박물관에 남아 있다. 반지름이 33.4㎝의 돌파편으로 되어 있는 이 유물은 자(子)·축(丑)·인(寅)·묘(卯)까지의 글자만이 남아 있고 나머지는 모두 없어져 정확히 이것이 해시계의 일부였는지 아니면 식점반(式占盤)의 한 부분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물시계에 대한 기록으로는 통일신라 때인 718년(성덕왕 17)에 누각(漏刻)을 만들고, 누각전(漏刻典)을 두었는데, 이 관서에 박사가 6명이고 직원이 1명 있었다고 ≪삼국사기≫에는 전하고 있다. 또, 같은 책에는 749년(경덕왕 8) 누각박사 6명과 천문박사 1명을 두었다는 기록도 있어서 서로 약간의 모순을 보인다.

당시의 누각 즉 물시계가 어떤 모양의 것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대체로 3단의 그릇을 배치한 동양의 전통적인 모양의 것이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또, 삼국시대 초기부터 삼국에는 각기 일자(日者)·일관(日官) 등의 이름을 가진 관리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554년에는 백제의 역박사(曆博士) 등이 일본에 건너가서 활약하였다.

602년에는 백제의 승려 관륵이 일본에 역법을 전하였으며, 660년에 일본에서 만든 물시계와 675년에 만든 천문대가 모두 삼국시대 백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이룩된 것으로 밝혀져 있다.

삼국시대의 우리 기록에는 분명히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 해시계와 물시계 등은 삼국시대에 널리 보급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삼국시대에 각국에서 만든 많은 종 가운데에는 시각을 알리기 위한 장치로 사용된 것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시각을 알리기 위해서는 종 이외에도 북 등이 사용되었는데, 신라 혜공왕 때에는 구리 12만 근을 써서 만든 큰 종을 쳐서 시각을 알린 일이 있는데 그 소리가 100리 이상까지 퍼졌다는 기록이 있다. 시간에 맞추어 종을 치기 위해서는 그 근처에 물시계 같은 시설이 있었을 것이다.

(2)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도 정확히 시계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앞의 경우처럼 고려에도 시각을 알리는 큰 종이 충목왕 때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또 고려 일대를 통하여 서운관 또는 관상감은 이름을 바꾸어가며 기구를 바꾸었지만 언제나 시각을 담당하는 관원이 있었다.

물시계와 해시계 등의 시계가 만들어져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서운관의 담당과업으로 천문·역산 이외에 각루(刻漏)가 명시되었을 뿐 아니라 그 담당자로 장루(掌漏)와 설호정(挈壺正) 등의 관직이 표시되어 있다.

(3) 조선시대

조선왕조를 개창하고 새 서울로 한양을 정한 태조는 1395년(태조 4) 큰 종을 만들어 전각을 지어 걸어두고 새벽과 저녁마다 종을 울려 시민들의 활동시한을 정해주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이 종에는 권근(權近)의 명문도 새겨져 있었으며, 오늘날 그 종은 사라진 채 명문만이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종루(鐘樓)에는 당연히 시간을 측정하는 시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1398년 윤5월에 경루(更漏)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그 경우이다.

이 경루란 고려 때부터 사용되던 물시계를 다시 만든 것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1424년(세종 6) 궁궐 안에 경점지기(更點之器)를 구리를 부어 만들라고 지시한 경우도 이와 비슷한 물시계였을 것이다.

이처럼 물시계는 여러 곳에 설치되었고, 그에 따라 역시 여기저기 세워진 종이 아침저녁으로 울려 통행금지시간을 알려주었다. 1414년 태종은 그 때까지 5경 초에 64번 치던 바라[罷漏]를 알리는 종을 5경 3점에 28번만 치도록 고쳤다. 또, 저녁에 통행금지를 시작하는 인경[人定]은 종을 치지 않기로 고쳐 정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에는 인경을 저녁 초경 3점에 28수(宿)를 따라 28번 종을 쳤고, 새벽 5경 3점에는 바라로 33천(天)을 나타내어 33번 종을 쳤다. 그것이 1884년(고종 21)에는 금천교(禁川橋)에서 쏘는 대포가 종소리를 대신하도록 바뀌기도 하였다.

장영실(蔣英實)이 1434년 세종의 명을 받아 완성한 자격루(自擊漏)는 바로 이런 여러 가지 물시계 가운데 가장 정확한 표준시계로 등장한 것이었다. 특히, 이 자격루는 자동시보장치가 달려 있어서 사람들이 지키고 있지 않아도 시각을 저절로 알려주는 정교한 시계였다.

3단의 물통으로 짜여진 자격루의 마지막 단계에서 잣대가 물을 따라 올라가 일정한 높이에 이르면 미리 장전해 둔 쇠알이 굴러 떨어지면서 인형을 나타나게 하고 종·징·북을 울려주게 장치한 자동물시계였다.

세종은 경복궁의 경회루 남쪽에 보루각(報漏閣)을 세워 이 물시계를 그 안에 설치해 두었고, 시계 이상의 정교한 천문장치를 겸한 장영실의 옥루(玉漏)가 경회루 동쪽의 흠경각(欽敬閣)에 설치되었다.

지금 서울 덕수궁에 남아 있는 물시계는 장영실의 자격루가 아니라 1세기 뒤인 1536년(중종 31)에 만들었던 물시계의 물통들이 남아 있는 것이다. 1985년 국보로 지정된 창경궁 자격루 누기가 세종 때의 자격루와 얼마나 다른지 확실히 밝혀져 있지는 않다.

그 크기 등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자격루의 작동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한 기록이 김돈(金墩)의 ≪보루각기≫ 등에 남아 있고 거의 같은 내용이 실록이나 그 밖의 책에 실려 있다.

자격루와 옥루를 만든 세종 때에는 여러 가지 다른 시계가 역시 제작되었다. 물시계로 간편한 행루(行漏)가 만들어져 군문에까지 보내졌는데 물을 보내주는 그릇과 물받이 그릇 하나씩으로 되어 있는 휴대용 물시계였다.

그러나 세종대의 시계로는 앙부일구(仰釜日晷)·현주일구(縣珠日晷)·천평일구(天平日晷)·정남일구(定南日晷) 등 네 가지 해시계[日晷]를 빼놓을 수 없다.

이 가운데 특히 앙부일구는 중국에서는 거의 만들어지지 않은 채 세종대에 우리 나라에서 제작되기 시작해서 그 뒤 계속 널리 보급되고 일본에까지 그 영향을 남긴 대표적 해시계였다.

불행히도 17세기 이전의 유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 뒤의 것으로는 여러 가지 형태의 크고 작은 크기의 앙부일구가 남아 있다. 그 가운데에는 손바닥에 들어가는 작은 크기의 앙부일구가 나침반과 함께 들어 있는 것도 있다.

세종은 앙부일구를 크게 만들어 혜정교(惠政橋:지금의 종로1가) 다리 위와 종묘 앞에 설치하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시간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했다.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시신(時神)을 동물 모양으로 그려 나타내었다.

앙부일구의 둥근 내면에는 시각선 이외에도 13줄의 위선이 그려져 있어서 24절기를 나타낸다. 즉, 그림자의 길이가 어느 절기를 따라가고 있는가를 보아 그때의 절기를 알 수 있게 한 것이다. 말하자면 양력 날짜까지 알 수 있는 정확한 해시계가 공중용으로 세워진 것이다.

해시계와 물시계 이외에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는 낮에는 해시계로 그리고 밤에는 별시계로 작동하게 만든, 역시 세종대의 시계였다. 이것 또한 간단한 축소형이 제작되었으니 이를 소정시의(小定時儀)라 불렀다.

또한, 세종은 경회루 연못 북쪽에 40자 높이의 구리기둥을 세웠는데 이 동표(銅表)는 해시계의 변형인 셈으로 특히 동지에 해의 고도를 측정하는 장치로 쓰였다.

서양식 해시계로는 1636년(인조 14) 명나라 이천경(李天徑)이 만들어 1644년쯤 우리 나라에 전해진 것으로 보이는 대리석제의 지평일구(地平日晷)와 그것을 본떠 국내에서 다시 만들어놓은 유물들이 지금 남아 있다. 13줄의 위선이 밖으로 갈수록 쌍곡선 모양으로 넓게 그려진 평면 해시계로서 이것에는 더 작은 휴대용도 유물로 남아 있다.

역시 중국에 와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해시계로는 간평혼개일구(簡平渾蓋日晷)가 있다. 1785년(정조 9) 관상감에서 만든 유물이 현재 세종대왕기념관에 남아 있다.

1881년(고종 18) 강윤(姜潤)이 만든 것으로 밝혀져 있는 평면해시계는 지금 창덕궁과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남아 있는데 삼각형의 동표에 반원형으로 낮 시간만을 표시하게 만들고 시간표시는 초정(初正)을 나누어 놓았다.

강윤의 해시계가 서양의 영향을 받지 않은 해시계의 마지막을 보여준다면, 덕수궁의 석조전 앞에 있는 둥근 해시계는 강윤의 해시계처럼 거의 평면이면서 시반에 글자가 아라비아 숫자로 써 있는 19세기 후반의 청동제 작품이다.

서양 과학기술의 영향을 가장 빠르게 받아들인 분야는 다름아닌 시계제작 분야였다. 실제로 자연시계에서 기계시계로의 이행은 우리 나라에서는 서양시계의 영향으로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1631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정두원(鄭斗源)이 몇 가지 서양문물 가운데 자명종(自鳴鐘)을 가지고 들어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서양시계는 중국사람들에게 큰 인기 품목이어서 1732년(영조 8)까지 중국에 들어온 자명종류는 4,000개 이상이었다고 추산될 정도이다.

해마다 적어도 한번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게 되어 있던 조선의 인사들은 북경에 머무는 동안 신기한 구경을 하고 그런 것들을 책과 함께 구해오는 경우가 많았다. 자명종도 상당수가 수입되었다고 생각된다. 당시의 자명종은 지금의 자명종과는 달리 정해진 시각에 종이 규정된 대로 울리는 괘종시계를 가리킨 것이었다.

이 기계시계는 우리 역사에 두 갈래의 영향을 주며 시계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한 가지는 서양식 자명종을 그대로 만들어보려는 노력이 활발해진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자명종의 기계장치를 전통적인 자동 물시계장치와 결합시켜 새로운 형태의 시계를 만들어 보려는 노력이 그것이었다.

전통적인 수력을 이용한 자동장치 대신 자명종의 기계장치를 채용한 천문시계로는 국보 제230호로 지정되어 있는 혼천시계(渾天時計)를 들 수 있다. 지금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이 시계는 길이 약 120㎝, 높이 98㎝, 너비 52㎝의 나무상자 속에 설치되어 있다.

시계부분과 혼천의 부분의 둘로 구성되었는데, 시계 부분은 두 개의 추를 운동시켜 움직이게 되어 있고, 그에 따라 혼천의가 움직이게 된다. 시각에 따라 시패가 창문에 나타나고, 종이 시각수만큼 울리게 된다. 이 천문시계는 1669년(현종 10) 관상감의 천문학교수 송이영(宋以穎)이 제작한 것이다.

같은 해에 함께 천문학교수로 있던 이민철(李敏哲)도 혼천시계를 만들었는데 이민철의 것은 자동수력장치를 사용한 것이었다.

1687년(숙종 13)에 숙종은 이들 혼천시계를 수리하게 했는데 이민철의 것은 자신에게 그 일을 맡겼으나, 이 때 송이영은 이미 죽은 뒤였기 때문에 천문학자 이진정(李縝精)에게 자명종식의 혼천시계를 맡겼다. 그 뒤에도 혼천시계는 더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확실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서양식 자명종을 그대로 만들어 보려는 노력으로는 1723년(경종 3) 왕명으로 만든 문신종(問辰鐘)을 들 수 있다. 낮과 밤 어느 때나 시간을 알 수 있는 이 시계는 청나라에 갔던 진하사(陳賀使)에게 청나라에서 준 것을 임금이 관상감에 보내 그대로 복제품을 만들어볼 것을 명한 것이다.

이미 이 때쯤이면 시계를 만들어낸 일이 여러 차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김육(金堉)은 밀양의 유흥발(劉興發)이 일본상인이 들여온 자명종을 보고 그 이치를 스스로 터득하여 자기 나름의 자명종을 제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1636년 중국에 가서 자명종을 보았으나 그 이치를 알지 못하였다고 쓴 기록도 있다. 어쨌든 유흥발이 자명종을 만든 것은 김육이 죽은 1658년(효종 9) 이전의 일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1759년 홍대용(洪大容)이 29세 때 나주를 여행하다가 당시 70세가 넘은 기술자 나경적(羅景績)을 만났는데, 그의 책상 위에는 이미 그가 만든 자명종이 놓여 있었다. 홍대용이 그 때를 회고하면서 남긴 글에 의하면 나경적의 시계는 아주 정확하게 맞는 것이었다.

이에 자극을 받아 홍대용은 나경적에게 부탁하여 자기 시계를 만들었다. 그의 집 안에 세운 사설 천문대에는 후종(候鐘)을 만들어 두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자명종이었다.

그가 1766년 북경을 방문하였을 때 서양 선교사들을 찾아가 자명종과 요종(鬧鐘)을 구경한 기록도 남아 있다. 또, 그와 친교가 있던 황윤석(黃胤錫)에 의하면 홍대용과 황윤석은 함께 1772년 2월 흥양으로 염영서(廉永瑞)가 만든 자명종을 구경갔다는 기록도 있다. 실제로 황윤석은 ‘윤종기(輪鐘記)’라는 글을 남겼는데, 이것은 자명종의 구조 등을 설명한 내용이다.

자명종의 구조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남병철(南秉哲)의 ≪의기집설 儀器輯說≫에도 자세히 나와 있다. 이 책은 프랑스에는 시계기술자가 2,000명이나 있어서 해마다 자명종 1만8000개를 만든다는 것 등을 당시 중국에서 나온 서양 소개서인 ≪해국도지≫·≪영환지략≫을 인용하여 소개하고 그 제작법까지 상세히 기록하였다.

이규경(李奎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의하면 노성(魯城)의 윤달규(尹達圭)는 수종(水鐘) 또는 수명종(水鳴鐘)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이민철이 만든 혼천시계와 비슷하였던 것으로 되어 있다. 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지만 1820년(순조 20)쯤의 일인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때에 세자는 강이중(姜彛中)·강이오(姜彛五)를 시켜 기계장치를 이용한 천문시계를 만들었다고도 기록하고 있다. 이규경의 다른 글에 의하면 19세기 초의 시계제작자로는 이들 이외에도 최천악(崔天岳)·김흥덕(金興德) 등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

개화기 이전에 한국인이 만든 기계시계 가운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것 등 불과 몇이 되지 않는다. 개화기 이후 일제강점기를 지나는 동안 많은 유물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서 현대적인 시계생산이 시작된 것은 1959년 기계시계가 조립판매되면서부터였다. 부품을 수입하여 조립하는 수준이었던 시계공업은 그 뒤 국산화율을 높여 1977년 이후에는 전자시계 생산으로 방향으로 바꾸기 시작하였다.

7개의 대형업체와 50여 개의 중소업체가 기계시계와 전자시계를 생산하고 있는데, 1984년에는 생산량이 1,000만 개를 초과하였고, 시계류 총수출이 1억 5000만달러를 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때쯤부터는 국산시계도 고급화하는 추세를 나타내고 있다. 1988년의 경우 한국시계공업협회에 140여 개의 업체가 가입하고 있다. 1988년에는 5,000만 개 이상을 생산하였고 수출액은 2억 6000만달러에 달하였다.

참고문헌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의기집설(儀器輯說)』
「이씨조선의 시계제작소고」(전상운, 『향토서울』 17, 1963)
「세종대의 천문학발달」(박성래, 『세종조문화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집필자
박성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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