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원

  • 역사
  • 인물
  • 조선 전기
  • 조선 후기
조선시대 영유현령, 남병사 등을 역임한 무신.
이칭
  • 숙헌(叔獻)
인물/전통 인물
  • 관련 사건이괄의 난|병자호란
  • 본관평산(平山)
  • 사망 연도1641년(인조 19)
  • 성별남성
  • 주요 관직영유현령|남병사
  • 출생 연도1581년(선조 14)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정하명 (육군사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5년 05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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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영유현령, 남병사 등을 역임한 무신.

개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숙헌(叔獻). 우의정 신개(申槩)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신확(申確)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05년(선조 38)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등용되었다. 그 뒤 온성판관을 거쳐 부사로 승진하였다.

1619년(광해군 11) 영유현령(永柔縣令)이 되어 관서지방의 민생을 구휼한 공으로 가자(加資)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신교(薪橋)에서 패전한 관군을 수습하여 안현(鞍峴)에서 반군을 대파함으로써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으로 녹훈되고, 평녕군(平寧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남병사(南兵使)가 되었는데, 이 당시 군액(軍額: 군사업무에 필요한 물자를 구하기 위한 세금)이 모자라 국방업무에 큰 차질이 있자 신경원은 한정(閑丁)을 무려 550여 인이나 찾아내 군포를 부과시켰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부원수로 맹산 철옹성(鐵瓮城)을 지키고 있다가 적의 복병에게 생포되자 수십일 동안 단식으로 항거하였다. 이듬해 강화가 성립되자 패전의 죄로 멀리 귀양갔다. 1638년에 곧 석방되자, 몇몇 조신들이 석방시키지 말 것을 종용하였으나 왕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이듬해 총융사 겸 포도대장이 되었다.

참고문헌

  •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 『인조실록(仁祖實錄)』

  • - 『효종실록(孝宗實錄)』

  • - 『외암집(巍巖集)』

주석

  • 주1

    : 가계 : 외암유고(巍巖遺稿) 卷之十六, 신경원 행장.(한국문집총간)

  • 주2

    : 유배 : 인조실록35권, 1637년(인조 15) 9월 27일. "조강에 《시전》을 강하다. 심기원·신경원을 남한에 이배시키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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