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도발하고 만주전역에서 독립군토벌작전을 전개함으로써 한국독립군부대들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은 난국을 효율적으로 타개하기 위하여 그 해 12월 17일 조선혁명당은 신빈현 하북(新賓縣河北)에 있는 교포의 집에서 긴급간부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중앙집행위원장에 이호원(李浩源)을 선임하고 각 중앙부서의 임원도 개선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장소가 통화(通化)의 일본영사관에 탐지됨으로써 기습을 받게 되었다. 일본경찰 50명과 중국보안대 100여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는 그 달 19일 회의장을 포위, 공격하였다. 이 때 이 회의장의 간부들은 경계를 태만히 하고 주연을 벌이고 있어서 제대로 응전을 하지 못하고 잡히고 말았다.
이때 일본경찰에 잡힌 인사는 중앙집행위원장을 비롯, 김관웅(金寬雄)·이종건(李鍾建)·장세용(張世湧)·이규성(李奎星)·박치화(朴致化)·전운학(田雲學)·차용륙(車用陸)·김보안(金輔安)·이동산(李東山) 등 중요간부 다수였다.
조선혁명당은 중요간부 대다수가 잡힘으로써 큰 타격을 받았으나, 이에 실망하지 않고 조직을 재정비한 뒤 중국군과 연합군을 결성, 영릉가(永陵街)·신빈로성(新賓老城)·흥경성(興京城) 등지에서 일본·만주군과 복수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