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신응식(申應植), 일명 유인(唯仁). 호는 석초(石艸) 혹은 석초(石初). 충청남도 서천 출신. 아버지는 신긍우(申肯雨)이다.
향리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한학을 공부하다가 상경하여 192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신병으로 중퇴하였다. 이 무렵부터 문학에 뜻을 두었다.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호세이대학[法政大學] 철학과에 입학,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사상의 영향을 받아 카프(KAPF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맹원으로 활약하였다.
이 무렵 프랑스문학 특히 발레리에 크게 심취하였으며, 1935년에는 『신조선(新朝鮮)』 편집일을 맡아보았고, 1948년 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1954년 한국일보에 입사하여 1957년에는 논설위원 겸 문화부장에 취임하였다. 그 뒤 예술원회원(1960), 한국시인협회 회장(1965), 한국문인협회 시분과위원장(1965∼1966) 등을 역임하였다. 1961년 서라벌예술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그의 문단 활동은 1931년 신유인(申唯仁)이라는 이름으로 『중앙일보』에 「문학창작의 고정화(固定化)에 항(抗)하여」를 발표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이 논문은 볼셰비키화한 카프의 창작방법론의 강요에 항의하는 내용으로서, 카프의 창작방법론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자신의 가정환경이나 발레리의 작품 「텍스트씨」를 읽은 감동 등으로 사상적 고민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박영희(朴英熙)의 전향선언과 함께 1933년 탈퇴원을 제출하고, 이듬해 카프의 해산과 함께 관계를 끓었다. 1935년 무렵부터 이육사(李陸史)와 알게 되어 막역한 지기(知己)가 되었고, 서정주(徐廷柱)·김광균(金光均)·윤곤강(尹崑崗) 등과 함께 1937년 ‘자오선(子午線)’ 동인으로 참가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다.
「호접(胡蝶)」·「무녀의 춤」을 『자오선』 1호에 발표하였고, 이어 1939년『시학(詩學)』지에 「파초(芭蕉)」(1호)·「가야금(伽倻琴)」(2호)·「묘(墓)」(4호) 등을 발표하였다. 『문장(文章)』과 『인문평론(人文評論)』이 폐간되자 침묵을 지킴으로써 친일 문학에 동조하기를 거부하였으며, 광복과 더불어 1946년 제1시집 『석초시집(石艸詩集)』을 간행하였다.
이어 1959년에는 제2시집 『바라춤』, 1970년 제3시집 『폭풍의 노래』, 1974년 제4집 『처용(處容)은 말한다』와 제5시집 『수유동운(水踰洞韻)』을 간행하였다. 그는 대체로 엄격한 구성과 고전적 심미성을 추구하는 작품 세계를 전개하여왔는데, 이러한 작품 세계는 발레리와 노장사상 사이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을 바탕으로 구축되고 있다.
즉, 사고의 조직성을 추구한 발레리(Valery,P.A.)의 엄밀성과 명석성을 형태적인 바탕으로 삼고, 여기에 노장사상의 출세간적 달관(出世間的達觀)의 경지를 담아 보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대체로, 과작에 속하는 그의 작품 가운데 45연 427행으로 된 장시 「바라춤」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시는 이승의 내적 갈등을 다룬 작품으로서 동양정신과 서구시적 요소의 이중적인 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다.
1969년 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