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언준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중앙일보, 세계신문, 동아일보 등에서 활동하면서 중국의 반일여론 조성에 기여한 언론인 · 독립운동가.
이칭
은암(隱巖)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4년(고종 41)
사망 연도
1938년
출생지
평안남도 평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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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때, 중앙일보, 세계신문, 동아일보 등에서 활동하면서 중국의 반일여론 조성에 기여한 언론인 · 독립운동가.
개설

호는 은암(隱巖). 평안남도 평원 출신.

생애 및 활동사항

정주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1923년 중국으로 건너가 항저우영문전수학교[杭州英文專修學校] 및 우쑹국립정치대학[吳淞國立政治大學], 둥우대학[東吳大學] 법률과를 졸업하였다.

1924년 대학재학 시절에 상해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를 발기하였다. 이어 1926년에는 상해 한인학우회(韓人學友會)의 집행위원과 후보위원이 되어 민족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1927년 상해 흥사단(興士團) 입단 이후로는 줄곧 안창호(安昌浩)와 행동을 같이하면서, 중국어·영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교섭·통역을 담당하였다. 또한, 인성학교(仁成學校) 학감을 맡아 독립운동가 자녀의 민족교육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한편, 중국의 『중앙일보(中央日報)』 논설위원과 『세계신문(世界新聞)』 아주부장(亞洲部長)을 보임하면서 언론계와 인연을 맺었고, 1929년에는 『동아일보』 상해·난징(南京)지역 특파원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7년간 상해임시정부와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상황을 국내에 보도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각 신문·잡지에도 독립운동에 관한 논설들을 발표해 중국인의 항일기운을 고취시켰다.

신언준의 언론활동 가운데 특히 돋보이는 것이 1931년 7월에 발생한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의 취재보도였다. 신언준은 이 사건이 한·중 두 민족을 이간시키려는 일제의 간교한 술책에 기인하고 있다는 점을 정확히 간파, 한인의 중국인 배척운동을 제지시켰다.

나아가 신언준은 그 뒤 중국정부의 외교부장을 방문하고 중국의 신문기자초대회 등을 개최하는 등 중국의 반일여론 조성에 기여하였다. 또 안창호가 잡힌 뒤에는 김구(金九)와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해 1933년 중국군사위원회와 접촉, 한인청년들을 중국군관학교(中國軍官學校) 간부훈련단에 입단시키는 교섭을 벌이기도 하였다.

더욱이, 신언준은 대문호 노신(魯迅)·채원배(蔡元培) 등을 비롯한 중국의 지사·정치가들과 교분이 두터웠던 관계로 임시정부와 중국정부와의 교섭 업무를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신언준논설선』(신일철 편, 1986)
「로신과 조선사람」(리정문, 『아리랑』 13, 중국연변인민출판사, 1983)
『동아일보(東亞日報)』
『신동아(新東亞)』(1934년 4월호)
『國外に於ける容疑朝鮮人名簿』(朝鮮總督府警務局,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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