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1655년(효종 6) 건립. 비신의 높이 148㎝, 너비 71㎝, 두께 24㎝.
비문은 우의정 심희수(沈喜壽)가 짓고 면천군수 이산태(李山太)가 썼으며 홍문관 부제학 여이징(呂爾徵)이 두전(頭篆)을 썼다.
비문에는 신중엄의 일생이 기술되어 있는데, 자는 희범(希范), 본관은 고령으로 일찍이 4살 때 어머니를, 16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계모 슬하에서 성장했다. 종조부의 덕택으로 음보로서 동궁의 하급관리로 나갔고 경복궁의 중수역을 맡았다. 그 뒤 군자감 직장, 예빈시 주부, 사헌부 감찰 등을 지내다가 1561년 용담현(龍潭縣)에서 지방관으로 5년 재임했고 1571년 다시 상주로 나갔다. 서울로 돌아와 종부시 주부, 상서원 판관, 장예원 사의를 지낸 뒤 순천군수로 나갔고, 1584년 사옹원 판관을 지내다가 수안군수로 나갔다. 다시 돌아와 상방 판관을 지내다 이듬해 작은 일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591년부터 계모와 계조모의 상을 치른 뒤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598년 명나라 원군이 식량이 떨어지자 집안의 곡식을 내어주었는데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1601년에는 80세의 나이로 첨추(僉樞)가 되어 가선대부에 올랐으며 이어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604년 2월 사망했고, 42년 뒤에 자손의 공로로 좌찬성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