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공왕대의 선승 신행선사는 장년에 중이 되어 당나라에서 지공(志空) 밑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단속사에서 불법을 선양한 고승이다.
신행선사는 779년(혜공왕 15)에 입적하였는데 선사가 입적한 지 35년만인 813년(헌덕왕 5) 선사를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비를 건립하였다. 비는 조선 후기에 분실되었는데 다행히 비의 탁본이 전해오며 유희해(劉喜海)의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전문이 실려 있다. 이에 의하면, 비의 높이 5.6척, 너비 2.5척, 1행 63자 29행으로, 비문은 김헌정(金獻貞)이 지었으며 승 영업(靈業)이 썼다.
서체는 행서로 왕희지(王羲之)풍이다. 영업이 당나라에 유학한 당시 왕희지의 글씨가 유행했고 신라에서도 왕희지의 글씨가 전해져 유행했으므로 영업도 왕희지의 글씨를 익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왕희지의 글씨보다 필획은 더 굳세고 힘차며 운필은 더 활달하고 시원스러워 영업의 독자적 경지라 하겠다. 김생(金生)과 함께 신라 서예의 쌍벽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