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승탑의 높이는 2.15m이고, 탑비 몸돌의 높이는 1.10m이며, 너비와 두께는 각각 0.6m와 0.2m이다. 고려 말∼조선 초에 활동하였던 정지국사 지천(智泉)의 유골을 봉안한 승탑과 그의 행적과 업적 등을 기록한 탑비로, 1398년(태조 7)에 건립되었다. 용문사 은행나무의 오른쪽 산능선에 있으며, 탑비는 승탑에서 80m 정도 떨어진 아래쪽에 있다.
승탑은 문인 조안(祖眼) 등이 주관하여 세웠는데,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여러 장의 길고 큰 돌로 조립한 탑구(塔區)의 가운데에 서 있다.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은 네모나지만, 윗받침돌과 몸돌은 단면이 8각이어서, 우리나라 승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원당형(圓堂形)을 계승하였다.
바닥돌은 길고 큰 널돌을 넓게 결구(結構)하여 마련하였는데, 그 위에는 하나의 돌로 조성한 아래받침돌이 놓여 있다. 아래받침돌의 옆면에는 하나의 꽃잎[單葉]이 아래로 향한 복련(覆蓮)의 연꽃무늬가 각 모서리마다 1개씩, 각 변에는 5개씩 모두 24개가 새겨져 있다. 윗면의 가운데에는 네모난 2단의 낮고 높직한 굄과 함께 둥글고 낮은 1단의 굄이 마련되어 있다. 가운데받침돌은 마치 북을 엎어 놓은 것처럼 위아래의 너비가 좁고 가운데의 너비는 넓은 모습인데, 겉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이 부드러운 곡선을 보일 뿐이다. 윗받침돌은 밑면에 3단의 각진 받침이 있고, 옆면에는 하나의 꽃잎이 위로 솟아 있는 앙련(仰蓮)의 연꽃 무늬 16개가 장식되어 있다.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서 각진 1단의 굄을 새겼다.
몸돌은 위아래부분에 덮개돌 모양과 굽 모양이 새겨져 있고, 각 면의 좌우에는 모서리 기둥이 조각되어 있다. 1면에만 문비(門扉) 모양이 새겨져 있는데, 퇴화된 양식이다. 지붕돌은 몸돌 바로 윗부분에 3단의 받침이 있고, 처마 밑에는 낮은 부연(副椽)이 조각되었으며, 각 모서리마다 각진 서까래를 두었다. 윗면인 낙수면에는 내림마루인 우동(隅棟)이 크게 두드러져 표현되었으며, 각 모서리의 전각(轉角)에는 퇴화된 귀꽃무늬가 장식되었다.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는 완전하지 않아서, 현재는 앙련을 새긴 돌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다.
탑비는 무덤 앞에 세우는 작은 비석인 갈석(碣石)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규모이다. 윗부분은 모서리가 양쪽 모두 접힌 모습이고, 글자를 새긴 주위인 위아래와 좌우의 테두리에는 가는 선이 처져 있다. 비명은 당시에 활동하였던 권근(權近)이 지었는데, 몸돌의 앞면에 각 행마다 44자씩 모두 20행으로 새겨져 있다. 비액(碑額)은 소전(小篆)으로, 지름 4㎝ 정도의 크기이며, 비명은 지름 1.5㎝ 안팎의 해서체인 소해(小楷)로 쓰여 있다. 다만, 서형태미(書形態美)로는 소해이지만, 당시 유행하였던 당해(唐楷)의 범주에 속하는 서체이다. 몸돌의 옆면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고, 뒷면의 비음(碑陰)에는 당시의 찬조자 명단이 6단 21행으로 적혀 있다.
이 탑비는 바위 위에 있는데, 아래부분의 왼쪽이 약간 파손된 것을 제외하면 비교적 양호한 상태이다. 깔끔한 필치와 정갈한 구성이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