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계문(季文). 신응모(申應模)의 아들이다.
1862년(철종 13)에 정시 병과에 합격, 출사(出仕)한 뒤 1864년(고종 원년) 사헌부 지평(持平)을 거쳐 1867년 집의(執議), 1869년에는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 1883년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승진되었고, 1884년 12월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올랐다.
1885년에는 독판(督辦) 김윤식(金允植), 협판(協辦) 서상우(徐相雨)와 더불어 ‘중조전선조약(中朝電線條約)’에 조선측 대표로 조인하였다. 그 뒤 1887년 이조참판, 1892년 1월에 형조판서가 되었고, 같은 해 8월에는 다시 한성부 판윤(判尹)에 임명된 뒤 1894년 7월 예조판서를 거쳐 다음달에는 경기관찰사로 체직되었다.
이 때 경기, 강원도 일대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 진압을 지휘하였고, 특히 홍천(洪川) 농민군 탄압에 공이 컸던 맹영재(孟英在)의 활약상을 중앙에 보고하기도 하였다. 그 뒤 1898년에 중추원(中樞院) 일등의관(一等議官), 1902년 4월에는 최익현(崔益鉉), 장석룡(張錫龍) 등과 함께 궁내부(宮內府) 특진관(特進官)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