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청원 출신. 30세에 기독교에 입교한 뒤, 1913년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로 공주에서 포교활동을 하였다.
1917년에는 평양남산현교회(平壤南山峴敎會)에 전임으로 가서 포교와 교육사업에 정진하였다. 1919년 2월 14일 당시 기독교 북감리파 목사이었던 신홍식은 평양의 기홀병원(紀笏病院)에서 동지규합을 위하여 평양에 온 이인환(李寅煥, 李昇薰의 본명)으로부터 3·1독립만세운동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호응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2월 20일 이인환의 집에서 오화영(吳華英) 등의 동지와 모여 서울과 각 지방에서 동지를 모아 일본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협의하고, 이인환·이필주(李弼柱) 등의 동지와 함께 기독교측 대표 16명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하였다.
28일 밤에는 서울 재동 손병희(孫秉熙)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이튿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따른 최종협의를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자진 체포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