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백수(伯修), 호는 함재(涵齋). 심봉휘(沈鳳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심성희(沈聖希)이고, 아버지는 심공헌(沈公獻)이며, 어머니는 이도진(李道鎭)의 딸이다.
1776년(영조 52)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777년(정조 1) 관서암행어사, 이듬해에는 강화어사로 파견되었다. 이 해에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 채제공(蔡濟恭)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뒤 『서장문견록(書狀文見錄)』을 지어 정조에게 바쳤다. 왕이 청나라 문물에 대하여 묻자 “건륭제(乾隆帝)는 영주(英主: 현명한 군주)이나 연로하고 정령(政令)이 가혹하여 백성이 불안에 떨고 있으며, 중화(中華)의 문물이 땅에 떨어져 강남 한족(漢族)도 오랑캐 풍습을 따르고 있다.”고 하였다.
청나라에서 돌아와 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으며, 1780년 함종부사·규장각직제학·이조참의를 거쳐, 1782년 홍문관부제학으로 감인당상(監印堂上)에 임명되었으나, 대사간의 탄핵을 받아 홍주(洪州: 현재의 충청남도 홍천)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1783년 황해도관찰사로 있다가 임지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