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대지(待之), 호는 오휴당(五休堂). 밀양 출생. 아버지는 참판에 추증된 안광소(安光紹)이며, 어머니는 고성이씨(固城李氏)로 참의에 증직된 교(校)의 딸이다. 처음에 안여경(安餘慶)에게 글을 배우다가 뒤에 장현광(張顯光)을 사사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남병사 김시민(金時敏)의 진중에 들어가 많은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경전을 연구하였으며, 특히 『심경』과 『소학』을 좋아하였다. 서당이 전란으로 파괴되어 학생들이 배울 곳이 없자 동지를 규합하여 서당을 지어 학생들에게 교육을 권장하였고, 향사당(鄕射堂)을 짓고 조약을 만들어 권학하는 규칙을 세웠다.
『주자가례』에 우리나라 선현의 논설을 첨가하여 『가례부체(家禮附贅)』 6권을 편찬하고, 『오현전(五賢傳)』 1권과 우리나라의 말과 중국의 한자말에 대한 연구서 『자해(字解)』 2권을 지어 선비들의 학문에 자료가 되도록 하였다. 선비들의 분경을 싫어하여 그것을 이단보다 더 큰 피해가 된다고 역설하고 평생 동안 권귀의 문전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저서로는 『오휴당집(五休堂集)』 2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