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인서(仁瑞), 호는 사촌(沙村). 아버지는 호군(護軍) 안총(安聰)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고, 8세 때 시부(詩賦)를 지었다. 유성룡(柳成龍)·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84년(선조 17)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뽑혀 있었으나 시관들의 분쟁으로 탈락되고 말았다. 1591년 관학(館學)의 유생들이 대신들의 죄를 성토할 때 그가 장의(掌議)로서 주관하였다. 이 일로 권신들의 미움을 받아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1603년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풍기에 낙향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살았다. 1606년 성균관에 올라왔다가 문묘의 동무(東廡, 무(廡)는 문묘(文廟) 안의 동서쪽에 있는 행각(行閣)을 말한다. 여러 유현(儒賢)의 위패를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로 나누어 배향했다.)에 익명으로 조신들을 중상모략한 낙서를 발견하고 하인들을 시켜 지워버리게 한 일로 문초를 받았으나 곧 풀려났다.
향리에서 이황(李滉)의 예안향약(禮安鄕約)을 응용, 실정에 맞게 시정하여 향풍을 진작시켰다. 풍기의 숭현사(崇賢祠)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