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에서는 이상동(李相東)의 단독시위가 기폭제 역할을 하여 1919년 3월 17일예안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된 뒤 3월 말까지 계속해서 격렬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처음 계획은 일본유학생 강대극(姜大極) 등이 3월 12일의 예안장날을 이용해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했으나, 일제의 삼엄한 감시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안면장 신상면(申相冕) 등은 다음 장날인 17일에 전개하기로 재계획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 등사하였다. 3월 17일 오후 3시 30분경, 주동자들은 수천 명의 장꾼들을 동원해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행진하였다.
오후 6시경 주재소로 몰려가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투석으로 주재소를 파괴하였다. 그러나 안동수비대에서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25명이 잡히고 해산하였다.
22일에 2차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이때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는 일본군과 투석전을 벌여 13명이 부상하였다. 군내의 가장 격렬한 만세운동은 안동읍에서 전개되었다. 3월 18일 기독교인·천도교인 등 3,000여 명의 시위군중은 군청·경찰서·지방법원 안동지청을 파괴, 방화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제지하던 일본군의 사격으로 말미암아 여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일제의 만행에 격분한 기독교인·천도교인·농민 등 3,000여 명의 시위군중은 23일 다시 관공서를 포위하고 투석하였다. 이때도 일본군의 야만적 발포로 14명이 현장에서 죽고 수십명이 부상하였다.
길안면에서는 손영학(孫永學)·김정익(金正翼)·김정연(金正演)·장두희(張斗熙) 등이 3월 21일의 천지(泉旨)장날을 이용해 500여 명의 시위군중을 주동해 면사무소와 경찰관주재소를 습격 파괴하였다. 이 곳에서도 실탄 사격을 감행하는 일본경찰과의 사이에 투석전이 전개되었다.
임동면에서는 유연성(柳淵成)·유동수(柳東洙)·이강욱(李康郁) 등에 의해 3월 21일편항(鞭巷)장날에 1,0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 때 일본경찰이 공포를 발사하자 분노한 시위군중은 주재소를 습격해 서류와 기물을 파괴하고 그 안에 비치된 권총 등 무기를 빼앗아 우물에 버리고 새벽 3시까지 만세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안동에서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57명이 잡혀 옥고를 치렀다.
임하면에서는 임찬일(林燦逸)·손돌이(孫乭伊) 등이 3월 21일 오후 9시경, 5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관주재소 앞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경찰의 발포로 3명이 현장에서 죽자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는 등 격렬한 운동으로 변하였다.
임북면에서는 권태환(權泰煥) 등의 주동으로 3월 22일, 일직면에서는 이구덕(李九德)의 주동으로 3월 21일, 동후면에서는 23일, 도산면 토계동에서는 3월 18일, 풍산면에서는 3월 24일, 풍남면에서는 3월 27일에 각각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