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때 중앙지도체 48인중의 한 사람이다. 평안남도 평원 출신.
1911년 1월 이른바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윤치호(尹致昊)·이승훈(李昇薰) 등과 함께 옥고를 치렀다.
조국광복의 기운이 고조되고 있던 1919년 2월 20일 밤, 당시 평양기독서원(平壤基督書院) 총무로 재직하면서 이갑성(李甲成)·오상근(吳尙根)·현순(玄楯)·함태영(咸台永) 등과 서울 남대문로5가의 함태영 집에서 만나, 독립운동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이튿날에는 다시 세브란스병원내의 이갑성 방에서 이승훈·박희도(朴熙道)·오기선(吳基善)·오화영(吳華英)·신홍식(申洪植)·김세환(金世煥)·함태영 등의 기독교측 대표들과 만나,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천도교측과의 연합문제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22일에는 다시 기독교측 대표들과 만나 무조건 천도교측과 연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자신은 임규(林圭)와 함께 일본정부에 한국의 독립을 통보하고, 일본 귀족원과 중의원에 독립청원서와 이유서를 전달할 책임을 맡았다.
이에 박희도로부터 여비 500원을 받아 27일 남대문역을 출발하여 3월 1일 동경역에 도착, 우선 간타구[神田區] 준하대(駿河臺)의 용명관(龍名館)에 투숙하였다.
3월 4일에는 경시청에 가서 경시총감을 만나 여러 차례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설명하다가 3월 5일 붙잡혔다. 그뒤 재판이 계속되는 동안 긴 옥고를 치르다가 결국 무죄로 석방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