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악군은 민족운동과 신문화운동의 근원지로 이미 안악의거와 105인사건을 통해 많은 희생과 곤욕을 겪었다. 일제의 감시가 삼엄해 서울과 도내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에도 감히 거사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은홍면 온정리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고종황제의 인산(因山) 참배차 상경했다가, 서울에서 전개된 3·1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고 돌아온 박치간(朴治幹)·정계로(鄭啓老)·유용원(柳龍源) 등이 주동해 3월 11일에 일어났다.
은홍·대행·서하 등 3면에서 모인 수백 명의 군중은 박치간의 독립선언서 낭독이 있은 뒤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선두로 시위행진에 들어갔다. 그러나 출동한 일본헌병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3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많은 사람이 부상하였으며, 주동 인물들은 검거, 구금되었다.
그 뒤 안악읍에서는 3월 28일, 기독교인 중심으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되었으나 25명이 강제 검속된 채 해산하였다. 4월 2일에는 다시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500∼600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29일용문면 동창리에서도 만세시위가 크게 전개되었다. 이 날 12시경 예배당의 종소리를 신호로 기독교인과 배영학교(培英學校) 생도들은 준비한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에 나섰다. 이때 온 장터의 장꾼들과 주민들이 가세해 시위군세는 온 시가지를 진동시켰다.
이에 당황한 헌병주재소에서는 안악읍의 헌병·경찰의 증원을 받아 시위대열을 해산시키고 닥치는대로 검거, 구금하였다. 구금된 50여 명에게는 갖은 악랄한 고문을 가하였다. 그 중 만세시위에 앞장섰던 정정렬·김은애·장학래 등 여성들에 대해서는 윤리도덕을 외면한 나체수욕(裸體羞辱)을 자행하였다.
일제측의 이러한 만행을 알게 된 민중은 격분하여 다시 일어섰다. 청년들은 4월 8일 다시 조직적인 제2차 동창포만세시위를 거행했으나, 일제는 처음부터 야만적인 무력행동으로 시위행렬을 저지했기 때문에 시위군중은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밖에 3월 31일문산면에서 70여 명의 군중이, 4월 7일용순면에서 김관섭(金寬燮)·김기형(金基瀅) 등의 주동으로 400여 명의 군중이 각각 만세시위를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