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선계(善繼). 호는 옥천(玉川). 아버지는 하양훈도(河陽訓導) 안응운(安應雲)이며, 어머니는 양성이씨(陽城李氏)로 경원판관 이세복(李世福)의 딸이다.
1570년(선조 3)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은거하였다. 『중용』·『대학』·『심경』·『예기』 등의 글을 읽어 자기를 닦고 남을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았다.
1580년에 정구(鄭逑)가 창녕군수가 되어 학교를 크게 진흥하여 여덟 채의 서당을 세웠는데, 그 첫째인 물계서당(勿溪書堂)에 안여경으로 강장(講長)을 삼았다. 또, 김우옹(金宇顒)이 이조판서가 되어 그를 추천하였으나 응하지 않고, 옥천산(玉川山)에 들어가서 정사를 짓고 스스로 옥천주인이라 불렀다.
안여경의 저서는 많았으나 임진·병자란 때 불타서 없어지고, 『옥천유고』 단권만이 남아 있다. 창녕의 관산사원(冠山書院) 별사(別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