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운익(雲翼), 호는 우봉(藕峯). 경상남도 고성 출신.
1919년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통감부와 일본정부에 논책문(論責文)을 보냈다가 몇 차례 구금되었고, 1910년 조국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병합되자 만국공관(萬國公館)에 호소문을 보내었다.
또한, 두 차례에 걸쳐 조선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에게 조국의 독립을 진정하는 글을 보냈다가,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3개월형에, 2년간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1919년 3월 이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자, 당시 한문교사로 있으면서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강기수(姜琪秀)·한관열(韓灌烈) 등 함안군내 청년유지들의 배후 고유구실을 하면서,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의 독립만세운동을 후원하였다.
그 뒤 이곳 독립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잡혀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옥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