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릉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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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황해북도 개풍군에 있는 고려후기 제20대 신종의 양릉에 부속된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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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에 있는 고려후기 제20대 신종의 양릉에 부속된 우물.
내용

양릉은 고려신종의 능이다. 우물의 도읍이라고 일컬어질 만한 개경이 가지고 있었던 많은 우물 가운데서도 개성대정·광명사정과 더불어 개성의 3대 신정(神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대정이나 광명사정과는 달리 누구에 의해서 어떤 연유로 파진 우물인지에 관해서는 기록이 보이지 않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명나라 홍무(洪武) 3년(1370)에 왕명으로 직접 파견된 조천궁(朝天宮) 도사 서사호(徐師昊)가 고려의 산천에 제사 드리는 과정에서 이 우물에도 치제(致祭)하였다고 전해져 있다.

그가 비석을 싣고 개성에 도착하였을 때 사람들에게 “도성 남쪽의 풍천(楓川)이 어디냐?”고 묻자 사람들은 양릉정이 바로 그러하다고 대답하고, 이로 인해서 서사호는 양릉정에 제사지내고 이내 비석을 그 안에 빠뜨리고 갔다고도 전해져 있다.

풍천과 동일시되고 있음을 중시한다면 양릉정은 시내의 원천인 한 자연샘 그 자체이거나 아니면 그 자연샘을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 우물로 간주될 수 있을 듯하다.

시내와 더불어, 시내의 원류로서 양릉정은 고려의 수도인 개경의 ‘물의 성역’을 이루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서사호는 고려인들의 신앙을 뒤쫓아 이에 제사지낸 것이라고 생각되는 바이지만, 그가 별나게 비석을 떨어뜨렸다는 대목에 유념해야 한다.

이는 이른바, ‘지기억압(地氣抑壓)’의 주술에 준하는 ‘수기억압(水氣抑壓)’의 주술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것인데, 이 우물이 성역이었던 만큼 그 ‘지리지적 억압의 주술’(중국에 의한)이 한층 돋보이게 된다.

이는 적어도 이 전설이 전해진 당대에 있어서 양릉정이 개경의 주민들에 의해서 왕성하게 신봉된 ‘물의 성역’이었음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고 해석되는 것이다.

그러나 광명사정이나 대정과는 달리 시조모신(始祖母神)과 직접 맺어진 전승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서는, 왕조의 신격과는 무관한 일반 민속신앙의 성역이었다고 판단된다.

생명의 원류, 생명 원리의 원천 등과 관련된 우물신앙에 여성원리가 겹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후세의 ‘용왕먹이기’라고 표현된 민속적인 물신앙 혹은 우물신앙의 한 원류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중경지(中京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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