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함평 출신. 의병장 심남일(沈南一)을 따라 일찍이 거의(擧義)한 이강산(李江山)이 1909년 7월 하순경 전라남도 함평군 대야면 복룡리에서 의병진을 편성하자, 이에 가담하였다. 가담한 날부터 이해 9월경까지 함평·영광을 비롯한 각지에서 왜적과 싸웠다.
그러던 중 그 해 8월 29일 함평군 대월면 내정리에 유진하고 있을 때 그 마을의 주막에 나타난 나주 헌병분견소 구밀파견소의 밀정인 이판안(李判安)·김정태(金正泰)·최치도(崔致道)·박복남(朴福男) 등 4명을 처단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이 드러나 처음에는 몸을 숨겼으나 끝내는 자수하여 1909년 12월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 항소하였으나 1910년 4월 끝내 사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1980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